◈ 대담:박승준 국제부장

“1967년 목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 시끌벅적하고 활기에 차있던 부두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한국 사람들의 소박함에 그야말로 홀딱 반했죠. ”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는 리처드 크리스텐슨(55) 주한 미 부대사는 13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면서 33년 전 목포항에 대한 기억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대학 졸업 직후인 67년 한국에 파견된 평화봉사단 85명 중 한 명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의 모교인 목포상고와 목포 제일중학교에서 2년간 영어를 가르쳤던 인연 때문이다. 이후 주한 미 대사관 부영사, 부참사관, 부대사 등의 자리로 27년의 외교관 생활 가운데 12년을 한국에서 보냈고 “‘원님 덕에 나팔 분다’는데 나야말로 부(부) 전문가”라고 농담할 만큼 우리말에 능숙한 ‘한국통’이 됐다. 21일 귀국하는 그를 박승준(박승준) 국제부장과 이자연(이자연) 기자가 미 대사관 내 부대사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시종 유머러스한 답변으로 웃음을 유도했다.

―머리를 왜 그렇게 짧게 깎고 계신가?

“한국에 더 있고 싶다고 삭발시위하고 있는 중이다. ”(웃음)(그러나 사실은 자꾸 빠지는 머리를 더이상 감추고 싶지 않아 1년 전쯤부터 아예 짧게 깎았다고 설명했다. )

―오다가 보니 대사관 경비가 매우 삼엄하던데.

“국제적인 테러에도 대비해야 하고 가끔 대사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통제를 할 수밖에 없다. 들어오면서 소지품 검사 등 절차가 까다로워 불쾌했을 것으로 안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

―미국인으로서 언론에 ‘한국통’ 외교관으로 불리는데.

“67년에 브루스 커밍스(현 시카고대학 교수로 한반도 전문가) 등과 함께 85명의 평화봉사단원의 일원으로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인 가운데 나만큼 한국어 잘하고 한국을 잘 아는 사람이 많다. 한국은 이제 그만큼 중요한 나라가 됐다. ”

―목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이야기를 좀 해달라.

“당시 나는 미국 촌놈이었다. 고향 위스콘신은 인구도 적고 생활이 단조로운 곳이었다. 그런 내가 스물두 살에 처음 본 동아시아의 한국이란 나라는 다채롭고 재미있는 곳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정이 많았고 활기가 넘쳤다. ”

―당시 교육환경은 어땠나?

“내가 가르치던 반은 자그마치 학생수가 74명이었다. ‘디스 이즈 어 북(This is a book)’이라고 가르치면 74명이 “디스 이즈 아 북!”하고 장난스럽게 따라외치는 소리가 하도 커서 부두까지 들릴 정도였다. 기타를 치면서 ‘쿰바야’ ‘스윙로’ 같은 영어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 학생들과는 지금까지도 가끔 만나지만 영어는 잘 못하면서, 그 때 가르친 노래는 아직도 잘 부른다. 나는 영어 선생으로서는 완전 실패다. 차라리 음악 선생이었다. ”(웃음)

―숙식은 어디서 했나?

“처음엔 교장 선생님 댁에서 묵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과 똑같이 소박하게 생활하고 싶어서 여인숙 하숙으로 옮겼다. 당시 월급은 1만1000원이었고, 방세는 한 달에 4500원이었다. 손을 뻗으면 양손이 벽에 닿는 작은 방이었지만 방과 후 10명 정도 학생들에게 그 방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

―한국 음식에는 잘 적응했나?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김치와 해산물을 곁들여 밥을 해줬는데 아주 맛있었다. 부임한 다음해 말복에 보신탕도 처음 먹어봤다. 좀 느글느글했지만 괜찮았다. ”

―67년 당시의 한국과 지금을 비교한다면?

“30년 동안 한국만큼 돌변한 사회는 없을 것이다. 사회적 책임의식이 뿌리내린 점은 발전이지만, 옛날에 내가 푹 빠졌던 그 소박함은 잃어가고 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같은 소설에는 당시 내가 느낀 한국인의 아기자기한 정감(정감)이 담겨 있다. 지금의 압구정동 문화와는 많이 다르다. ”

―98년 단국대에서 특별강연할 때 “한미간 마찰이 있을 때마다 ‘동상이몽(동상이몽)’이라는 말을 쓰지만 양국이 공동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상동몽(이상동몽)’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표현”이라고 말하는 등 평소 고사성어를 포함한 우리말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보여왔다. 우리말을 배우며 느낀 점은?

“한국어는 배우기 어려우면서도 배울수록 재밌다. 의태어나 의성어가 특히 그런데, ‘살금살금’ ‘성큼성큼’ 같은 말들은 영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실제로 그는 전라도 사투리를 감칠맛 나게 구사한다. )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인상을 간단히 평한다면?

“을지문덕 때부터 한국 지도자들은 강하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대통령 등 한국 대통령들은 다 통솔력 있는 스타일이라고 느꼈다. 94년 카터 전 대통령과 함께 북한을 방문해 면담한 고(고) 김일성 주석도 잘 생긴 얼굴에 통솔력 있는 강한 지도자라고 느꼈다. (그는 모두 여섯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 목포상고에 있었다니까 김대중 대통령과 아주 가까운 줄 알고 이력서를 들고 와서 취직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김 대통령에 대한 얘기는 목포에서부터 많이 들었고 몇 번 만나본 적은 있지만 특별히 잘 아는 사이는 아니다. ”

―예상보다 빨리 통일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최근 많아지고 있다. 뉴스위크 최신호에서 친북인사인 김명철씨는 2003년까지 통일이 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내 생각엔 그보다는 더 걸릴 것 같다. 어쨌든 언제 어떻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생각보다 빠를 수 있다는 전제하에 미리 완벽을 기해 통일시대에 대비하는 것이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

―한국인 부인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

“외교관 시험 통과 후 첫 근무지인 한국에 부영사로 왔을 때 영사과 직원이 모 여대 졸업반 학생 4명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왔다. 그 때 아내를 만났다. (4명 가운데 한 명과 사랑에 빠진 과정에 대해 묻자) 그 사람이 예쁘고 착해서였다고 말하면 한국에서는 부인 자랑한다고 흉보니까 이렇게 말하겠다. 그 사람이 그 중 회화실력이 떨어져서 따로 만나 ‘보충수업’을 했다고 말해두겠다. ” (웃음)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많아서 일일이 거명할 수는 없지만, 목포에서 만난 또래 친구들 3명을 들 수 있다. 영어는 잘 못했지만 날 좋아했고 내가 타지 생활에 어려워할 때 많이 도와줬다. 부두 앞에서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들 덕에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됐다고도 할 수 있다. 한 명은 죽었지만, 나머지 둘은 아직도 연락하고 있다. ”

―미국에 돌아가서의 계획은?

“1년간 안식년이라, 미 평화연구소(USIP)에서 ‘선비 같은 생활’을 할 생각이다. (그는 자신이 선비는 선비인데 ‘엉성한’ 선비라고 덧붙였다) 동북아 평화, 한반도의 평화통일·화합을 위해 미국이 해야 할 몫이 무언가,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을 계속 연구할 것이다. ”

크리스텐슨 부대사는 1시간여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 기자들에게 자신이 바쁜 몸이면서도 한국식으로 “더 있다가 가라”고 말하며 붙잡는 시늉을 했다.

/정리=이자연기자 4nature@chosun.com

/사진=이덕훈기자 leedh@chosun.com

크리스텐슨 약력

▲1945년생

▲67년 평화봉사단원으로 방한(목포서 영어교사)

▲73년 워싱턴대 석사(동아시아 연구)

▲88년 주한 미 대사관 1등 서기관(군사안보 담당)

▲91년 주오키나와 총영사

▲93년 국무부 한국담당 부과장

▲96년 주한 미 부대사

▲2000년 6월 30일 한미우호상 수상

▲부인 정화영씨와 사이에 1남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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