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명한 것을 추구하지만 너무 분명한 주장에는 일단 의심을 갖는다. 묻고, 따지고, 근거를 찾는 철학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진리는 양극단보다는 중간쯤에 있다는 것이 삶을 통해 얻은 조그만 지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양한 사상과 가치들을 조화롭게 엮어내는 화쟁(화쟁)과 상생(상생)의 집단적 무의식이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나는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지나치면 탈이 나게 마련이라는 인식을 더욱 더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매사에 뜨뜻미지근한 것보다는 ‘화끈한 것’을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음식도 담백한 것보다는 맛이 강한 것을 선호하고, 가능한 한 빨리 미치기 위해 폭탄주도 마다하지 않는 기질이 그렇다. 합리성을 생명으로 하는 학자들의 세계도 예외가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차근차근히 풀어가는 논증적인 글보다는 ‘해결’을 분명하게 내세우는 선정적인 글이 인기가 있다. 어떤 문제에 관해 입을 열기도 전에 사람들은 벌써 “색깔을 밝혀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우리의 문화가 중도를 허용하지 않는 극단주의에 의해 이미 오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으로 조성된 화해무드를 신뢰구축의 계기로 삼으려면 우선 이러한 극단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온갖 편견과 유언비어, 극우와 극좌의 파시즘을 생산하고 유포하였던 분단의 냉전체제가 녹아 없어질 수도 있다는 기대와 희망만으로도 그것은 분명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50년의 폐쇄적 대립이 단숨에 해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북한사회의 전면적 개방을 요구해선 안 되고, 북한도 남한사회의 민주적 기본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채 민족주의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통일의 열기는 냉전적 사고를 해체하기는커녕 오히려 화해를 방해하는 극단주의를 다시 배양하고 있다. 한편으로, 통일은 분명 우리의 민족적 염원이지만 통일론의 절대화는 오히려 상호인정과 공존공영의 걸림돌이 된다. 냉전체제는 남한과 북한을 적대관계로 갈라놓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반공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었다. 이념이든 국가든 아니면 민족이든, 무엇인가를 절대화하고 다른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는 반민주적 태도는 분명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중간을 인정하지 않고 선명한 극단을 선호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제거한 공포의 색깔론처럼 파쇼적 극단주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극단도 역시 극단이다. 통일무드와 함께 우리사회에는 다른 종류의 극단이 곰피고 있다. 통일의 방식과 민족의 미래에 관해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 모두 ‘반민족적이고 반통일적인 세력’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대상이 ‘용공’에서 ‘반통일’ 세력으로 바뀌었을 뿐, 극단주의는 여전히 다양한 목소리들을 봉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차이의 인정은 결코 상호신뢰를 구축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화해의 무드를 해치지 않으려면 북한의 인권문제, 탈북자 및 납북자 문제 등에 관해서 일단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언론의 자유를 위해 감옥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좌파적 지식인들에게서 특히 이런 소리를 많이 듣는다. 인내심을 가지고 북한의 변화를 기다려보자는 좋은 뜻에서 하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합의점을 찾아가는 열린 비판만이 진정한 통일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통일 문제에서만은 어떤 비판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극단주의가 모처럼의 화해무드를 망쳐서는 안 된다. 설령 그것이 화끈하지는 않더라도 뜨거운 가슴을 식히고 화해의 중도를 찾아가는 합리적 비판만이 통일을 앞당길 것이다.이 진 우 /계명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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