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어느날, 싸리재 초입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나무골 입구 ‘김응석병원’ 앞쪽 공터에도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기차 한 대가 기적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나타났다. 거기에는 북한으로 송환되는 포로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그들은 군가를 목 터져라 불러대고 있었다. 기차가 철교 위에 이르자 포로들은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송환 선물로 지급 받은 치약, 칫솔, 수첩 등과 심지어는 신고 다녀야 할 군화까지 마구 차창 밖으로 내던졌다.

군중들은 이 광경을 냉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기차는 곧 시야에서 사라지고 철교 밑에는 일용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철없던 또래들만이 무슨 경사나 난 듯이 한아름씩 안고 집에 갔다가 어른들한테 경을 치곤 했었다.

그러나 이같은 나의 체험담과는 달리 ‘65포로수용소’의 저자 오세희씨가 전하는 인천포로수용소의 실상은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1950년 10월 당시 20세의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그는 ‘인민군’으로 오인돼 학익동 ‘청소년 형무소’ 자리에 천여 명의 포로와 함께 수용됐다.

수용소에는 매일 같이 포로들이 몰려 들어 수만평에 철조망을 둘려친 임시수용소가 하나 더 늘어났다. 새로 만든 ‘바깥수용소’에는 약 4000여 명의 포로들이 수용됐으나 시설이라고는 천막 두 개와 언덕 위의 건물 몇 채가 전부였고 화장실에는 오물이 넘쳐 발 딛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포로들은 할 일없이 지내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밥그릇과 숟가락이 없어 제각기 남루한 옷자락을 벌여 거기에 안남미 밥 한 주격과 뜨거운 국을 받아 먹는 비참한 생활을 했다.

인천포로수용소 측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포로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매일 5000여 명씩을 인천역에서 부산 등지로 이송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황이 위태롭게 되자 인천포로수용소는 폐쇄되었다.

이 곳과는 달리 부평 지역에는 수복 직후 설립된 제10포로수용소가 있었다.

포로들은 미군 제44공병대가 관리했는데 1953년 6월 18일 밤 10시 정부의 묵인 아래 1470여 명이 탈출을 감행했다. 이들 반공 포로들은 감시원의 발포로 수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하지만 당시의 보도 관제로 지금까지 사건 진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 다른 포로수용소가 속칭 ‘하다찌’라고 불리던 용현동 미군 유류창 인근에 있었다고 전하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사정을 알 수 없는 형편이다.

1953년 6월20일자 구(구) ‘인천일보’가 “현재 남한 내에 수용되어 있는 애국 포로는 광주, 부산, 논산 등지의 3만7180명이다”라고 보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인천에는 잔류 포로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로부터 50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인천의 포로수용소 얘기를 들추어내는 것은 이를 인천사의 한 장면으로 마땅히 기록했어야 할 우리들의 게으름에 대한 반성의 계기로 삼자는 뜻에서이다. 〈광성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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