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정상의 만남은 민주 정권과 공산 정권 간의 협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줬다. 1930년대 유럽인들도 나치와 공산 정권을 맞아 남한과 유사한 딜레마에 빠졌었다.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전면전을 초래하고, 여론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대화는 지독한 독재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더구나 분쟁 준비의 시간까지 주게 마련이다.

이 같은 불균형은 평양 정상회담의 기이한 결과에서도 발견된다. 남한에서는 사람들이 통일의 약속을 얻은 듯이 기뻐했다. 당장의 전쟁 위협은 사라진 듯했다. 북한 정권은 인간의 얼굴을 가졌고, 흔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런 인식을 받은 일반 여론은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희열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남한이 약속과 희망을 얻었다면, 북한은 진짜 심리전에서 이기고 구체적 결실도 얻었다. 그 심리전은 일종의 정상성, 즉 북한 정권의 합법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남한이나 그 밖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번 정상회담을 인류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같은 고전적 독재와 연관지을 사안이 아니지 않으냐고 한다. 이 같은 착각은 분명히 그동안 우리가 다른 경로를 통해 북한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을 잊어버리게 한다.

나는 지난 96년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 북한이란 나라는 군사감옥이고, 국민들은 공포와 기아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능숙한 기예(기예)를 동원함으로써 3일 만에 이 같은 현실에 환각의 베일을 씌우는 데 성공했다. 그 기예란 연출력이다. 북한인들은 연출의 제왕들이고, 그 수장(수장) 자신은 나쁜 영화의 연출자다. 평양에 가면 단지 그 한 사람을 위해 세운 스튜디오를 구경할 수 있다. 조금 전에 상영된 영화(남북정상회담)에서 그는 감독과 주연을 겸했다.

잠정적으로 보기에, 그는 자신이 추구했던 목적, 즉 자기 정권의 생존을 얻어냈다. 그는 결코 남쪽을 정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북쪽을 현재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다.

지속을 위해 북한 정권은 군사적 보장과 경제 원조를 필요로 한다. 이번에 그 두 가지를 다 얻었다. 북한은 군사력 중에서 특히 중·단거리 탄도 미사일 폐기에 대한 어떠한 약속도 하지 않았다. 북한은 남쪽이 북침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지도자들이 그것을 확인해줬다.

북한의 공장은 멈췄고, 도시는 전기 단절로 어둠 속에 떨어져있다. 따라서 외국의 원조, 특히 남한의 도움은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이제 북한 정권은 그동안 가장 우선시했던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다고 북한이 완승을 거뒀고 남한이 완패했다고 결론짓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길게 보면 시대는 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북한이 지금 당장 얻은 것이라고는 시간뿐이지, 그 이상은 없다.

북한 정권은 본질적으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자기 개혁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나라 전체가 감옥인 그 나라의 문이 반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쪽의 일부는 북한의 연착륙을 꿈꾸고 있지만, 내게는 동독이나 소비에트 모델의 붕괴가 더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남한 정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연착륙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렇지 않는 것이 실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북한의 연출에 더 이상 쉽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기 소르망 (Guy Sorman) 문명비평가

/정리=박해현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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