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기(金昌基)


9·11 테러 사건이 나고 얼마 후, 서울의 한 서방 외교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북한은 테러 직후, 평양 주재 스웨덴 대사관을 통해 미국 정부에 보낸 메시지에서 워싱턴과 뉴욕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에 유감을 표시하면서 자신들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혔다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이 즉각적 반응에 대해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9·11 이후 묘하게도 북한이 테러와 관련하여 언급된 경우는 꽤 여러 차례 있었다.

우선은 국내에서부터, 9월 중순의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남북한이 공동으로 반(反)테러 선언 같은 것을 채택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우리 정부에서 제시돼 여론의 빈축을 사고 말았다.

곧 이어 미국 국무부가 작년초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북한이 오사마 빈 라덴 및 국제 테러 조직들과 연계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는 것이 새삼 세상의 조명을 받았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국제 테러조직에 관한 정보제공을 요청할지 모른다는 추측 보도들도 국내외에서 나돌았는데, 이는 북한과 테러조직의 연계를 상정한 것이었다.

10월 5일에는 국무부가 외국 테러단체 28개 명단을 발표하면서 2년 전까지 들어 있던 일본의 적군파(赤軍派)를 명단에서 해제했지만,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 들어 있는 북한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그 때 국내 일부 언론들은 적군파가 테러 조직에서 해제됐으니 적군파인 요도호 납치범들을 여전히 보호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테러 지원국’으로 남아 있는 북한도 그 명단에서 해제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식의 관측을 내놓았다. 물론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추론이었다.

최근에는 미국 의회의 테러 분석가 요세프 보단스키가 쓴 빈 라덴의 전기에서 빈 라덴이 북한으로부터 탄저균을 수입했다고 주장했다.

15일 미국 워싱턴의 보수적 연구기관인 헤리티지 재단에서 공화당 출신 뉴트 깅그리치 전(前) 하원의장도 9·11 테러 사태의 교훈에 관해 연설하면서 북한을 언급했다. 미국이 앞으로는 9·11테러의 배후로 지목되는 오사마 빈 라덴 같은 국제 테러리스트는 물론, 이라크나 북한과 같은 독재 국가, 그리고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 등 가능한 모든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북한에 관한 우리 국내의 분위기는 묘하다. 북한의 문제는 일부러 외면하려는 사람들이 상당하고, 문제를 거론하면 현실 직시라고 보지 않고 보수라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물론 북한이 최근 10여년간 이렇다하게 직접 테러에 관여된 일은 없다. 1983년의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나 1987년의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이후 실제로 테러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그 어떤 외국 테러조직과도 연계를 갖지 않았다면 좋은 일이다. 그래서 북한이 내년 봄에는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빠지게 된다면 여러모로 한반도 상황도 긍정적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사실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두가지 위험을 추론할 수 있다.

우선, 북한이 만일 지금 미국이 모든 힘을 기울여 척결하려는 국제 테러조직과의 연계를 아직도 지속하고 있다면 부시의 말처럼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있다. 미국으로서는 ‘테러 지원 세력에 대한 응징’이라지만 한반도에 사는 우리로서는 안정과 평화가 깨지는 일이 된다. 다른 하나는 만에 하나 북한이 과거처럼 우리에게 테러를 가할 생각을 다시 가질 가능성이다.

우리 사회는 현재 여러모로 취약하다. 대통령은 임기 말로 접어들어 있고, 내년엔 월드컵 대회에다가 대통령선거까지 치러야 한다. 테러 문제는 결코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넘길 것이 아니라, 극도로 유념하고 다각적으로 대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국제부장 chang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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