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비적 건축물'
◇ 78년 완공된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 일부.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성공적인 건축으로 꼽힌다.

오늘의 평양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솟아났던 80년대 초반을 북한은 "위대한 건설의 시대"라 부른다. 인민대학습당(1982년 완공), 평양산원(1980), 창광원(1980), 주체사상탑(1982), 청류관(1982),빙상관(1982), 개선문(1982), 창광거리 고층아파트단지(1980년1단계 착공) 등이 이때 계획되고 지어졌다.

98년 수령형상문학으로 나온 소설 "전환의 년대"(리신현 작)는 당시를 ‘건축혁명시대’로 규정하면서 그 주인공으로 "김정일동지"를 내세운다. 소설 속에서 김정일은 건축가들의 총사령관이며 설계와 시공에서도 탁월한 식견을 내놓는 판관이다.

김정일은 실제로 이 시기 건축을 진두지휘했다. 74년 2월 이후 후계자로 내정돼 있었던 그는 공식 등장하는 제6차 당대회(80년 10월)와 김일성 칠순(82년 4월)을 앞두고 권력의지를 매섭게 불태우면서 건축에서도 ‘혁명적 수령관’을 구현하고자 했다. 건축도 영화나 문학, 미술, 음악과 마찬가지로 “수령이 이룩한 업적과 그 위대성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정치성 다분한 이 건축이념은 오늘도 불변하는 주체건축의 최고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다.

창광거리 아파트단지는 80년 당시 윤환선(輪環線) 거리라고 불렸고, 페치카가 설치된 소련식 가옥들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소련파가 숙청된 이후 이 주택단지는 페치카 대신 온돌구조로 수리를 거쳤으나 김정일에 의해 "종파분자들의 사대주의적 행위로 생겨난 병신 같은 집"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이 주택가는 일거에 소탕되듯 폭파되고 만다. 여기에 30층짜리 창광거리 아파트가 솟아오른다. 정치적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 인민대학습당

인민대학습당 건축은 당시 가장 큰 비중을 갖는 대토목공사였다.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내용을 담는다"는 1950년대 후반 이후 북한의 건축 목표를 정점에서 대표하고 있다. 대형 도서관 인민대학습당은 여러 개 전통적 양식의 지붕이 군집을 이뤄 얼핏 보기에도 장관을 이룬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미국 의회도서관보다 더 훌륭한 도서관을 짓겠다"는 권력자의 강력한 의지의 결과다. 경기대 안창모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는 "평양대극장이나 인민대학습당과 같은 양식의 건축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측면에서 성공작으로 보이며 북한 현대건축의 중요한 성과인 셈"이라고 평가했다.


◇ 평양대극장

북한은 전통건축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전통을 그대로 복원한다는 개념도 갖고 있지 않다. 인민대학습당을 짓기 위해 120여명의 일급 설계사가 6개월 동안 밤잠 안 자고 매달려 성취한 설계안이 "불교 사원 같다"는 김정일의 한 마디에 폐기되고 마는 소설 ‘전환의 년대’ 속의 한 대목은 문학적 허구가 아니었던 듯하다. ‘봉건의 부활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결국 현실화되었으니 말이다. 평양대극장(1960), 옥류관(1960)을 시작으로 인민문화궁전(1974),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1978) 등이 이 양식의 계보에 놓여 있다.

김정일이 권력의 중심으로 발돋움하던 이 시기 건축은 지금도 북한이 내세우는 최대의 자랑거리다. 목욕탕(창광원), 산부인과 병원(평양산원), 식당(청류관)조차 ‘노동당시대의 대기념비적 창조물’로 탄생했는데 규모의 장대함에 비해 효율성과 기능성의 측면에서는 확실히 과도하다. 이 기념비적인 건축들은 평양에 ‘전시용 도시’라는 불명예를 안겨주는 데도 기여한다. 무엇보다 권력자의 터무니없는 건축열은 자원의 무리한 편중을 낳았고, 이후 내리막을 걷는 북한경제가 이 때 중추를 다친 것은 아닌가 하는 혐의를 강하게 남긴다.

/김미영기자 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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