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對韓)채무 18억달러 중 일부를 북한의 발전부문 현대화 사업에 지원하는 것으로 변제하자는 러시아의 제의는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러시아가 한국 돈으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점이다. 형식논리로 보면 한국이 북한에 경협지원을 하는 바에는 러시아가 한국에 갚을 돈을 대신 북한에 제공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추진하는 방식은 현금이 아닌 발전설비 등 현물을 지원하겠다는 것으로, 러시아 발전설비로 북한 전력산업을 현대화하면 북한의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는 그만큼 높아진다. 기술의존은 말할 것도 없고 부품공급과 애프터서비스도 러시아로부터 받아야 한다. 한국에 갚을 돈으로 침체한 러시아 발전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확대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겠다는 것이다.

러시아측 설명은 기존의 북한 발전설비 대부분이 구소련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발전부문 현대화 사업도 어차피 러시아 설비로 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효과도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이런 기조하에 작년 10월 이한동 국무총리의 러시아 방문 때부터 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해 지난 2월 한·러 정상회담 직전에 열린 한·러 경제공동위에서도 거론하는 등 계속 한국을 설득하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정부가 러시아의 제의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대북 퍼주기」 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 작년 12월 4차 장관급회담에서 200만㎾의 전력지원을 요청하면서 우선 50만㎾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정부가 분명한 결정을 하지 못한 것은 「대북 퍼주기 논란」을 의식한 측면이 많다. 물론 전력은 공산권에 수출이 금지된 전략물자라 미국과 사전에 협의해야 하기도 하지만 국내경제가 어려운 형편에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덮어놓고 지원하는 것은 국민의 동의를 받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러시아의 제의를 받아들이면 국민감정이 어떨지 정부로서는 유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아직 「원론적 수준」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지난 8월 북·러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모스크바 선언 내용 중 「북한 전력부문 개건을 위한 외부재정의 인입(引入)」에는 한국의 차관자금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러시아가 분명히 밝히고 있어, 사전에 한·러 간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 이 문제는 반드시 국회의 논의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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