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호

지난 7월 제네바 인권이사회에서 북한당국이 공개처형 사실을 단 한 건이나마 인정한 것은 그 정황과 처형당한 사람의 신원 등을 입증하는 증거(공개처형을 알리는 공고문 사진과 목격자들의 증언)가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물증 앞에서는 북한도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의 노동수용소(라오가이·勞改) 실상을 세계에 폭로한 헤리 우(63)씨도 중국에서 추방된 후 자신이 수용됐던 곳을 다시 찾아가 몰래 사진을 찍어옴으로써 증언의 신뢰도를 한층 높일 수 있었다. 1999년 12월 서울서 열린 북한인권대회에 참석한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한국어만 잘 하면 북한에 들어가 강제수용소 사진을 찍어 오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장담을 믿기에는 북한의 현실이 중국에 비해 너무나 가혹하다.

북한 인권문제에 관한 증거를 확보하기는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 정부처럼 손을 놓고 있다시피 해서도 결코 안될 일이다. 이와 관련해 분단시절 서독이 취했던 한가지 조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동독지역 정치적 폭력사례에 관한 기록보존소’의 존재다.

서독은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구축한 1961년 이 보존소를 설립했다. 장소는 동독과 가장 긴 국경을 가진 니더작센주중에서도 국경에 가까운 지방법원이 소재한 잘츠기터를 선택함으로써 상징성과 의지를 담았다. 여기에는 동독 이주민이나 탈주민, 동독 방문 서독인, 기타 각종 자료들로부터 수집한 인권침해 사례를 자세히 기록한 문서들이 보관됐다. 가해자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명기됐다. 동독의 코앞에다 이런 기록 보존소를 설치한 것 자체가 동독에 대한 무언의 강력한 경고와 압력이 됐다.

동독은 이것이 내정간섭이라며 강력히 반발했고, 서독과의 각종 회담에서도 보존소의 철폐를 주요 이슈로 부각시켰지만 서독은 통일의 순간까지 이를 유지했다. 통일후 이 기록들은 동독 관리들의 처벌과 재임용 여부를 결정하는데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정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됐다.

지금 국내외 탈북자는 수십만 명을 헤아리고 있다. 이들로부터 북한내의 인권침해 사례들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수집해 파주나 문산 쯤에다 기록보존소를 하나 만든다면 북한이 움찔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왜 그걸 못하는걸까.
/ 김현호 통한문제연구소장 h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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