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14일부터 그 결과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북한문제 전문가 3인의 긴급 좌담을 통해 이번 회담의 성과를 정리해 보고, 앞으로의 남북관계를 전망해 본다. 14일 저녁 본사 편집국에서 열린 좌담에는 유호열(유호열) 고려대 교수, 고유환(고유환) 동국대 교수, 김영윤(김영윤)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등이 참석했다.

▲유호열=14일 김대중(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의 2차 단독정상회담에서 포괄적인 합의서에 서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번 회담기간 이전부터 남북 양측 실무진 사이에서 상당한 의견 조율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13일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승용차 안에서 가진 55분간의 차중(차중) 단독회담은 14일의 합의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을 것이다.

▲김영윤=14일 오후 2차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두 정상간의 대화를 보면서, 상당히 극적인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라는 인상을 받았다.

▲고유환=적어도 13일 밤에 각 분야별로 양측 실무대표들이 비밀 접촉을 가지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14일 오전 김 대통령 일행과 김영남(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및 북측 인사들 사이의 ‘공식 면담‘은 참석자들의 면면을 볼 때 14일 오후의 합의서를 위한 실무적 논의를 했을 만한 인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2차 정상회담에서 합의로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실무준비가 상당히 있었음을 보여준다.

▲유=회담에 임하는 두 정상의 자세에 차이가 느껴졌다. 김 위원장은 처음부터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는데, 그 의지가 엿보였다. 반대로 우리 대통령은 회담이 가까워질수록 만남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라고 했고, 합의 가능한 사안부터 처리해 가겠다고 말해왔다. 김 위원장은 경협이나 이산가족 문제는 들어주겠지만, 그보다 뭔가 더욱 본질적인 사안들을 제기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김=이틀째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과정과 형태 등에서 몇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정상회담 분위기나 상황이 북한에 의해 주도되는 인상을 주고 있다. 13일 환영 만찬에 김정일 위원장은 참석하지 않았고, 14일 오전에는 ‘확대정상회담‘이 ‘공식 면담‘으로 바뀌었다. 북한은 실리 중심의 전략 속에 남측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얻어내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어떻게 보면 북한은 실리와 명분을 다 얻고 있는 상태다. 어제 북한 중앙방송은 이번 정상회담을 완전히 김정일이 주도하고 있다는 분위기로 보도했다. 결국 북한주민들에게 김 위원장을 한층 제고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고, 또 우리쪽 국민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다. 북한은 실리뿐만 아니라 명분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고=2차 정상회담의 의제는 처음부터 매우 포괄적이었다. 7·4성명에서 제기된 화해와 단결, 교류·협력 문제를 중점 논의하겠다고 돼 있다. 북한은 이런 의제들을 통해 통일회담으로서 정상회담을 이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인데, 이는 과거부터 북한이 취해온 전통적인 자세다. 다만 이번 회담이 과거와 다른 것은, 이전에는 14일 ‘공식 면담‘에서 김영남 위원장이 언급한 ‘보안법 철폐’나 주한미군 철수 요구와 직결되는 ‘자주(자주)’ 등의 의제들을 남북 당국간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이용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이를 철회하고 일단 정상회담을 한 다음에 논의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유=7·4 공동성명부터 계속되어온 사항들이 ‘전제조건’에서 ‘의제’로 변한 것만으로 보면, 이 문제를 앞으로도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북한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를 카드화할 수 있고, 상황변화에 따라 아차하는 순간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면책사유’로 이용하려 들 수 있을 것이다.

▲고=이번 정상회담은 한반도 문제의 남북 당사자 해결 구도를 마련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남한에 대해 미·일과의 공조 포기를 굳이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중국이 가장 환영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단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해결 구도가 확립되면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차근차근 나오게 돼 있고,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반면 중국의 영향력은 확대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은 결국 주변 4강들로 하여금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 경쟁을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김=14일 ‘공식 면담‘에 아태평화위원회나 민족경제협력연합 같은 단체들이 공식면담에 참여했다는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이들 기구가 앞으로 경협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무게를 실어주면서, 선보이는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금강산 관광은 아태평화위가, 민경련은 대남 기업활동의 창구다.

▲고=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큰 의미는 김 위원장이 ‘은둔정치’를 청산하고 대중정치인으로 변신할 것임을 예고한 데 있다고 본다. 앞으로 김 위원장의 통치스타일에서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정일은 1964년 대학을 졸업한 후 노동당에 들어가 약 30여년간 막후에서 실권을 행사해 왔다. 80년 6차 당대회 이전까지만 해도 이름이 대외적으로 공표되지 않은 가운데 ‘당 중앙’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통해 내부적 통치를 해 왔다.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으로 공식활동을 하고, 당내 실권은 은둔한 김 위원장이 행사한 것인데, 그것이 습성화된 것처럼 보였다. 1994년 아버지가 죽고도 그것이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번에 그것이 바뀐 것이다. 김 위원장이 은둔 통치에서 나왔다는 것은 앞으로 한반도 정세 등에서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당장은 서울 답방(답방) 가능성이 높고, 가을 유엔 본부에서 열리는 밀레니엄 정상회의에도 참석할 가능성이 있다. 결국 북한이 개혁·개방 쪽으로가려는 큰 그림이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유=지금까지도 김정일은 각지방에서 현지 지도도 해왔고 외국에도 다녀왔다고 하지만, 그것을 공개하지 않았었다. 본인이 스스로 ‘은둔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앞으로는 과거 아버지 김일성 주석처럼, 아니면 나아가 좀더 정상적인 국가의 지도자로서 나서겠다는 뜻을 피력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 아니면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자신감이 배어 있는 것 같다.

▲김=스스로가 바깥에 은둔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줘 왔다는 점을 인정한 것은, 앞으로 자신이 노출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앞으로의 남북관계는 북한이 그동안 부각시켜온 ‘남한 주적론(주적론)’의 상실이라는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90년대 이후 북한은 통미봉남(통미봉남)이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로, 미국에는 다가서면서 남한에는 적대적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런데 남한과 공존 협력관계를 구축한다면, 과연 북한은 남한의 우방인 미국·일본까지 3국과 다 화해하면서 개혁·개방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인지가 문제다. 북한이 그런 변화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따라서 개혁·개방을 추진하기 위해서 어쩌면 역설적으로 다시 긴장국면으로 부분적 회귀를 할 가능성도 있다. 가령 미국 또는 일본을 주적으로 삼거나, 아니면 남북간에 긴장국면으로 다시 돌아가는 3가지 시나리오가 예상된다.

▲김=앞으로 남북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우선 정상회담을 통해 이뤄진 정치분야의 관계개선이 경제·사회·문화분야의 교류협력에 순기능적으로 작용할 것이고, 이것이 다시 정치적 교류를 증진시키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지속적인 포용정책의 추진이 중요하다.

/정리=박두식기자 dspark@chosun.com

/김덕한기자 duck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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