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충격’중의 하나는 북한에서 처음 남한 방송을 들었을 때였다.

간첩이라도 된 것처럼 마구 떨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하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들은 남한방송은 미제와 남조선이 침공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6·25전쟁이 김일성이 일으켰음을 가르쳐 주었다.

1989년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가 인민들에게 무참히 죽었을 때 그 소식을 전해 준 것도 남한 방송이었다. 멋진 남한노래를 몰래 녹음해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었던 것도 남한 방송 덕분이었다. 엄벌에 처하겠다는 당국의 포고문에도 아랑곳없이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란셔츠 입은 사나이’ ‘사랑의 미로’는 북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기자와 같은 경험을 했던, 또 지금도 하고 있을 사람들은 북한 사회 구석구석에 수없이 많을 것이다. 남한의 대북방송은 북한사람들에게 바깥의 소식을 전해주고 진실을 알게 하는 유일한 창구인 것이다.

외화상점이나 중국을 통해 카세트 오디오가 북한으로 본격 유입되면서 당국의 단속은 더욱 심해졌다. 의심되는 집에 불시에 들어와 라디오나 카세트테이프를 검열하는가 하면 보위부원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항상 귀를 곤두세웠다.

한번 걸리면 치명적이기 때문에 남한방송을 듣는 것은 아주 신중해야 한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아예 단파 라디오를 두 대 정도 구입해 한 대는 검열용으로 쓰고, 다른 한 대는 감춰놓고 듣는다. 대학생들은 간단한 라디오를 조립하기도 하고, 납땜한 라디오를 몰래 풀어서 듣다가 검열 나올 기미가 보이면 다시 납땜하기도 했다.

남한방송을 듣기 위한 북한주민들의 노력은 실로 눈물겹다. 많은 젊은이들이 남한방송 듣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수용소로 끌려갔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향한 젊은이들의 욕망은 그 어떤 탄압으로도 꺾을 수 없다.

이번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에 대해서도 북한 언론은 찬양 일색이다. 러시아언론을 비롯한 외국언론에서 보도하는 내용을 북한주민들은 들을 수 없다. 남한 방송이 이런 소식들을 있는 그대로 전해만 주어도 북한 주민들의 의식은 크게 바뀔 것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진실을 전해야 할 대북 방송이 북한 정권을 의식해 제대로 말을 못한다면 이는 목숨을 걸고 귀기울이는 북한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갸날픈 희망의 창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이들의 절망감과 배신감을 남한 사람들이 짐작이나 하겠는가. 통일의 순간까지 대북 방송은 그 어떤 분위기에 휩쓸려서도 안된다.

/강철환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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