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자 보신주의 정책결정시스템 반영하는 듯"
외화벌이, 민심관리용 가능성도 제기..지원단체 곤혹

북한이 수해 속에서도 대규모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을 계속하고 있다고 조선중앙방송이 21일 밝혀 눈길을 끈다.

수해를 이유로 남북정상회담마저 10월초로 한달여 연기한 것과 대조된다.

◇회담 연기와 대조 = 김금룡 '아리랑 국가준비위원회' 연출 실장은 이날 중앙방송과 인터뷰에서 "해마다 전통적으로 열리게 되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관람하기 위해 매일 수만 명의 각 계층 근로자와 청소년, 학생, 해외동포, 외국인들이 5월1일경기장으로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올해보다 수해 규모가 작았던 작년에도 홍수로 능라도가 물에 잠겨 5.1경기장이 피해를 입으면서 아리랑공연을 중단했었다는 점에서 올해 '공연 계속'에 의문이 제기된다.

연인원 10만여명이 출연하는 초대형 야외공연 작품인 아리랑은 서장, 종장, 본문 1~4장 및 종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공연시간은 1시간 20여분이다.

문제는 올해 수해가 평양지역에 집중된 가운데 평양시민 대부분이 복구작업에 동원된 상황에서 출연자들이 공연에 참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 이번 수해로 평양지역의 전력공급과 통신 등이 차질을 빚고 곳곳에서 도로가 두절된 상황에서 출연자와 관람객 양면에서 공연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상식이다. 공연이 열리는 5.1경기장은 범람 위기를 겪은 대동강 지역이다.

아리랑 공연은 북한 주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동원사업의 일환이다.

북한은 아리랑 공연이 시작되면 아리랑 열차나 버스 등을 운영하면서 지방주민들을 평양으로 데려가 공연을 보여주고 평양관광을 시켜줌으로써 국가의 배려에 감사하도록 해 주민들의 충성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번 수해로 지방에서 평양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철도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고 각 지방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주민들이 동원된 상황에서 아리랑 참관사업을 계속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때문에, 북한의 수해가 과연 북한 주장대로 정상회담을 연기할 만큼 심각한 것이냐는 의문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그러나 청와대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북한의 수해상황이 심각한 것은 남측의 여러 가지 취재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것 같고 우리가 갖고 있는 다양한 정보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수해에 10만명을 동원한 아리랑 공연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엔 "아리랑 공연을 하느냐 마느냐는 그 공연이 북에서 갖고 있는 비중과 의미에 대한 자신들의 판단이기 때문에 우리가 논평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다양한 관측 = 북한이 '아리랑 공연 계속'을 밝힌 이유에 대해, 1차적으론 북한 사회의 후진적 정책결정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공연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공연을 책임진 실무자들이 상부에 보고를 제대로 못하고 결심을 받아내지 못하면서 관성적으로 공연을 지속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 7일부터 폭우가 쏟아져 곳곳에서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음에도, 14일 개성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준비접촉에서 남측 대표단의 육로 방북에 합의하고 회담의 정상 개최를 공언했지만 결국 4일만인 지난 18일 회담 연기를 요청했고, 20일엔 펴양-개성 고속도로의 노반 붕괴 등 파손 사실을 밝혔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에서 정상회담의 연기나 아리랑 공연의 중단을 최종 결정하려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승인이 필요하다"며 "아직 실무자들이 제대로 실태 보고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한 북한문제 전문가도 "북한 실무자들이 수해로 인해 아리랑 공연이 어렵다는 '제의서(보고서)'를 김정일 위원장에게 올리면 중단이 가능할텐데 보신주의에 빠져 '현상유지'하고 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작년 7월 수해 때도 북한은 7월21일부터 평양시의 피해상황을 보도하기 시작했으나, 그로부터 10일이 지난 30일에야 남쪽에 아리랑 공연의 중단을 통보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외화벌이 등을 위해 수해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리랑 공연을 강행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북한은 2005년 아리랑 공연을 남측 관광객을 포함한 외부인들에게 보여주고 관람수입으로 1천100만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인들에게 북한의 관광상품을 소개하는 조선관광 사이트도 아직 아리랑 공연이 계속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중국 단둥의 K여행사 관계자는 21일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조선(북한)에 큰물 피해가 크게 나기는 했지만 현재 중국인 관광객의 입출국은 여행사 일정에 따라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과 유럽지역의 관광객을 모집해 평양으로 들여보내고 있는 미국계 여행사의 한 관계자도 "북한에 수해가 발생한 이후에도 2개팀이 선양(瀋陽)에서 고려항공을 타고 방북해 정상적으로 아리랑 공연을 보고 나왔다"며 "이번주 토요일에도 1개팀이 예정대로 북한에 들어간다"고 전했다.

북한은 그동안 예약을 받아놓은 해외의 아리랑 관광객들을 위해 공연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더구나 북한은 아리랑이 "세계적으로 가장 큰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으로 인정받아" 올해 기네스북에 등재됐다고 최근 자랑해왔다.

또 북한이 실제로 앞으로도 아리랑 공연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라면, 수해로 민심이 흉흉해진 상황에서 아리랑 공연을 통해 사회 분위기를 낙관적으로 이끌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대북 수해지원에 나선 남측 대북지원단체들은 곤혹스럽다는 입장이다.

한 관계자는 "북한이 엄청나게 많은 수의 출연자를 동원하는 아리랑 공연을 계속하고 있다면 과연 국내에서 북한 주민들이 겪는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겠느냐"며 수해지원 모금 등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을 우려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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