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평양공항 도착 장면을 TV에서 지켜보던 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예기치 못한 출현에 적잖이 놀랐다. 극적인 상봉에서 시작된 남북정상의 회담은 국제사회에 대단히 좋고,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연속 방영될 TV 드라마라고 치면, 두 정상이 공동주연을 맡은 드라마는 첫 회부터 세계 시청자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다.

김 대통령의 표정은 변함없이 온화해 보였다. 하지만 그 표정의 뒤편에는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을 달성하려는 결의로 가득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로 민족화해에 전력투구하겠다는 의지가 보는 사람에게까지 잘 전해졌다.

김정일 위원장에겐 유교적 예절이랄까, 연장자에게 경의를 표할 줄 아는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수행원까지 배려하는 그의 예의작법(례의작법)은 같은 동포인 한국에는 물론 유사한 정신·도덕문화를 공유하는 동양권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 위원장에 대해선 일본 내에서 부정적 이미지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평양에서 보내온 영상은 김 위원장이 그동안의 평가 이상으로 전략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데 충분한 것이었다. 머리회전도 빠르다는 느낌을 주었고, 시원시원한 태도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두 정상이 공항에서 같은 자동차에 동승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며 ‘차내(차내) 회담’으로 실마리를 풀어간 것은 회담의 알맹이를 도출해낼 가능성을 높여준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본다. 언론에 보도된 두 정상의 대화록을 보면 서로가 상대를 배려해주려 애쓰고 있음이 느껴졌다.

첫 날 만찬에서 김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화해와 협력, 그리고 통일이라는 방식을 천명했다. 김 대통령이 이산가족 재회나 경제원조·직접투자 같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연설이나 회담석상 발언에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이런 문제가 두 정상 간에 어떤 방향으로 논의돼 결론지어질지가 정상회담을 감상하는 하나의 포인트가 될 것이다.

‘햇볕정책’을 견지하며 북한과의 대화를 끈질기게 쌓아나가겠다는 김 대통령의 전략은 명쾌해 보인다. 그는 북한 방문 전에 일본과 미국의 최고지도자와 회담함으로써 후방을 단단히 쌓아놓았다. 북한과의 대화를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 한·미·일 간 긴밀한 연대를 기초로 삼겠다는 의지를 재삼 분명히 한 셈이었다.

김영남(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만찬 연설에서 외국세력을 배제한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강조했는데, 이 점은 충분히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으로선 미국과 일본이 안보조약에 따라 북한과 한국의 자주적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태도를 취해왔다.

이번 정상회담도 이런 기초 위에서 남북간 대화를 구축하겠다는 의도임을 김영남 위원장의 연설은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연설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북한 당국자의 수사(수사)에 미국의 본토미사일 방위구상에 대한 공격과 일본의 납치문제 제기에 대한 비난 등이 전면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민족적 운명공동체를 강조하고 식민지주의·제국주의에 대한 한민족의 역사적 원한을 상기시켜주면서도 새로운 역사의 막을 공동으로 열어가자는 두 정상의 의지가 잘 표출된 회담이었다고 나는 평가한다.

좀더 광역적인 관점에서 보면 동아시아의 ‘대화해 시대’로의 첫걸음을 남북 정상이 동시에 디뎠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남·북한과 미·일·중·소 등 주변 국가 사이에 제한적으로밖에 화해가 성립되지 못했던 상황을 본질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 이노구치 다카시 (저구효) 도쿄대(동경대) 교수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