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거침없는 말과 제스처에 우리 국민들은 또 한번 놀랐다.

14일 오후 3시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정상회담. 김 위원장은 “서울의 테레비를 봤다”면서, 남한에서 사용하는 ‘탈북자’라는 단어를 직설적으로 말하는가 하면, 그동안 자신이 은둔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농담을 섞어가며 말했다. 이어 목란관에서 열린 만찬에서도 김 위원장 옆에 있던 김 대통령이 이희호 여사와 자리를 맞바꾸어 앉자, 김 위원장은 “왜 연회장에 들어와서까지도 이산가족을 만들려고 하느냐”며 “그래서 김 대통령이 이산가족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라고 재치있게 말했다. 남북 공동선언 서명이 끝난 뒤, 김 대통령과 건배에서도 단숨에 잔을 비우는 호기를 보였다.

전날 평양 순안공항에서 자유분방하고 격의없는 태도로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해 놀라게 했던 김 위원장은 이날 훨씬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점퍼 대신 정장형태의 말끔한 인민복을 입고, 갈색 선글라스 대신 색깔 없는 안경을 낀 채 시종 미소를 띠면서 대화를 이끌었다.

김 위원장은 “남쪽의 방송도 보고…”라며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했다. 또 자신이 그동안 외부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우스갯소리처럼 해명했다. “구라파 사람들이 나보고 ‘왜 은둔생활 하나’ 하는데…. 내가 중국도 갔댔고, 인도네시아도 갔는데 왜 나보고 은둔생활을 한다고 하는가. 김 대통령이 북한에 오셔서 내가 은둔생활에서 해방됐다고…. ” 좌중을 웃겨가며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놓았다.

그는 이 대목에서 처음에는 “적(적)들은…”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금방 “구라파 사람들…”이라고 고쳤다.

이날 우리 국민들은 TV 화면에 비친 김 위원장의 이틀째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박철현(30·대학생)씨는 “김 위원장은 비합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TV에 등장한 그의 모습은 여유가 넘쳐 솔직히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회사원 이상민(24·LG EDS 직원)씨는 “김 위원장은 귀하게 자라고 예술에 심취해 성격이 까다롭고 괴팍할 것으로 여겼는데, 상당히 호방하고 솔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계산된 연출’이라는 상반된 평가도 나오고 있다. 실향민 김순임(82·황해 해주 출신)씨는 “TV에 나오는 김 위원장은 의젓하고 솔직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를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의 독특한 이미지 관리는 영화광에다 TV·언론매체에 대한 오랜 감각에서 비롯됐다는 해석도 있다. 정상회담 일정을 하루 연기해 우려를 자아낸 후 의표를 찌른 공항영접 등으로 극적 반전을 연출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이런 모습이 전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동국대 최대석(44·북한학과) 교수는 “그동안 김 위원장이 일반인들이나 언론에는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지도자로 인식된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는 ‘제왕학’을 30여년간 전수받은 지도자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라고 말했다.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소 한종기 박사는 “이번 정상회담은 김 위원장 의도대로 초점을 자신에게 맞춘 것”이라며 “그의 자신감 넘치는 행동 속에 숨겨진 치밀한 계산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동섭기자 dskim@chosun.com

/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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