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가득 메운 진분홍 조화의 물결, 환영 인파 속 압도적 한복 차림, 커다란 리번을 단 소녀들의 춤추는 듯 커다란 몸짓의 경례. . .

남북 정상 회담 평양 방문단 일거수 일투족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면서 북한 이미지 폭풍이 불어오고 있다. 촌스러워 보이는 현란한 색조와 특이한 몸짓, 능수버들과 물레방아가 등장하는 극사실주의의 풍경화, 60~70년대 어디쯤에서 본듯한 옷차림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무차별로 안방에 쏟아져들어오면서 문화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을 통해 이미지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진 신세대들에게는 시각 이미지야말로 실체를 넘어서는 본질. 선망도 아니고 풍자나 조롱도 아니다. 내용도 중요하지 않다. 낯섦의 충격은 자연스레 흉내내기로 이어지며 광고, 디자인, 출판 등 문화산업에 ‘북한풍’을 몰고 오고 있다.

7ㆍ4남북 공동 성명 때나 92년 남북 고향방문단 때 등 남북이 접촉할 때마다 일정한 북한풍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의 북한풍은 ‘얼음 보숭이’처럼 말/말투를 중심으로 한 언어적인 것에 제한됐다. 시각적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이 이번 북한풍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미 선보이고 있는 북한풍 이미지는 주로 젊은 층 대상 광고에서다. 노리는 건 북한식 ‘촌티’가 연출하는 ‘즐거움’(fun)이다. 양말업체 ‘싹스탑’이 최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비슷해보이는 모델을 내세워 만든 신문 광고가 좋은 예. 양복과 인민복을 입었지만 양말은 알록달록한 걸로 신고, ‘백두에서 한라까지 양말부터 통일하자’ 했다. 이 회사는 지금 남과 북 군인 두명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2탄’을 준비해놓고 있다.

게임 웹진 ‘게임21’은 최근 ‘반갑습네다! 게임21의 빛나는 영도 아래 자나깨나 행복합네다!’라고 쓴 포스터를 시내 곳곳에 붙였다. 노랑 바탕 붉은 글씨에, 북한 어린이들이 깃발과 꽃을 들고 있는 그림을 곁들였다. 음악 서비스업체 ‘라이브’도 ‘김정일도 몰래보는 랄랄라’라는 카피를 쓴 포스터를 붙였다. 출판계에서도 북한풍 디자인이 시장을 엿본다. 최근 나온 김정일과 북한 관련 서적은 무겁고 학술적인 분위기를 벗어나 자극적 시각 디자인을 채용한다. 지식공작소가 펴낸 ‘김정일의 생각읽기’는 제목 활자체를 북한서 쓰는 활자체와 흡사한 것으로 고른데다, 푸른 별과, 사진, 사진 주변의 붉은 색을 사용, 얼핏 보면 북한에서 만든 삐라로 보일 정도다. 살림터의 ‘김정일의 통일전략’은 표지를 절반으로 나눠 왼쪽엔 빨간 바탕에 김정일이 손을 흔드는 사진을, 오른쪽엔 인민군 퍼레이드 장면을 써서 진짜 북에서 넘어온 책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패션 소품 ‘쌈지’ 천호균 사장은 북한풍의 정체를 “순박함의 충격”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그동안 서구식 미니멀리즘 같은 차갑고 세련된 스타일에 지쳐 인도나 티벳풍에 기울었던 사람들에게 대단히 호소력 있을 것 같다. 신성일ㆍ엄앵란이 활약했던 60년대를 연상케하는 따뜻함이 있다”고 평한 천사장은 “곧 북한풍을 재미있고 유쾌하게 반영한 캐릭터가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TV로 평양거리의 환영인파를 본 디자이너와 복식 학자들은 “원색의 강렬함을 보며 우리나라 60년대를 연상시키는 복고풍의 향수를 느꼈다”고 말했다. 의상 디자이너 이경원씨는 “서구적인 미니멀리즘과 차갑고 싸늘한 분위기에 싫증을 내고 있는 요즘, 60~70년대 우리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푸근한 촌스러움과 강렬한 원색의 북한풍이 자극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북한풍이 패션이나 광고를 넘어, 심지어 방송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적지않은 흔적을 남길 것으로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KBS ‘개그콘서트’ 서수민 PD의 “아이디어 회의에서 평양 도착 장면 비디오를 연구하자는 의견이 나왔다”는 말이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쉽게 싫증내고 또다른 새로움을 찾아나서는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속성으로 볼 때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칠 것이란 전망도 만만치 않다. 한국 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도식적으로 판에 박은 듯한 북 디자인으론 독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며 북한풍의 쇠퇴를 점쳤다.

/정리=박선이기자 sunnyp@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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