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작

한국사회는 지금 해방이후 가장 극심한 사상적, 정치적 혼란과 대립에 빠져 있다. 현대 민주주의의 요체는 권력의 다원적 분점이며, 이 분화된 권력간의 신뢰, 대화, 타협, 절충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민주주의 원리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폐기처분될 지경에 와 있고,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그럴 듯한 명분 아래 적과 동지의 편가르기에 의한 첨예한 정치전선이 구축되어서 쇠망치(때리는 자)와 모루받침대(맞는 자)가 연출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대치 상황에서 사회의 분열과 해체는 날로 가속화되어 가고 있다. 염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현상이 작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 분열과 해체 현상은 민족통일의 대망을 이룬 국가인 독일의 경우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동독의 주석이며 공산당 총서기였던 에리히 호네커가 서독의 슈미트 총리로부터 서독방문 초청을 받았던 것은 1981년 동서독 정상회담에서였다. 당시 공동발표문의 말미에 서독방문초청과 수락이 합의사항으로 문서화되어 공포되었다. 이것은 작년 평양에서 남북한 정상의 6·15선언의 끝 부분에 김정일 서울 답방이 포함된 것과 같다.

그러나 호네커의 서독 방문이 실현되기까지는 6년이란 긴 세월이 더 필요했고, 베를린장벽 붕괴(1989년)를 앞둔 1987년에 와서야 호네커는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다. 동서독 공존과 협력 시대를 열었던 서독 브란트 정부가 동독과 기본조약을 체결한 시점(1972년)에서 시작할 때 15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지나서야 동독 공산당 우두머리가 처음으로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독은 그 이전에 국내적·국제적 신뢰구축 작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인정받도록 성실히 노력해 왔다. 동독은 특히 1974년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동베를린에 미국대사관이 개설되도록 함으로써 서독의 맹방인 미국의 협조를 먼저 구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 정부는 마치 북한과 한목소리로 맹방인 미국을 남북관계의 장애요인으로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는 일부의 오해까지 있지 않은가. 이래서는 안 된다. 동독은 1975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 참여해 안전보장, 인권개선, 경제협력을 약속하고 실천함으로써 동독 내에 반체제 운동가들이 어느 정도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 주었고, 또한 종교의 자유와 교회행사를 광범위하게 허용하기도 하였다. 동독은 연 300만명이 넘는 인적교류를 허용하였다. 동독주민들은 서독 TV도 볼 수 있었다.

왜 이와 같은 선행조건을 충족하고 나서야 동독 공산당 총서기의 서독방문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비록 동서독 관계의 개선이 중요할지라도 서독정부는 서독민주주의 사회의 중추세력을 이루고 있는 건전한 주류 자유 보수주의자들의 정서와 정치적 입장을 존중하였고, 디 벨트(Die Welt)지, 데어 슈피겔(Der Spiegel)지 등 국민의 대다수가 애독하고 있는 서독언론을 적당한 명분으로 때려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서독 지도자나 동독 독재자가 원하는 대로 공산독재정권의 제일인자가 일격에 서독 민주시민사회를 점령하듯 방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독 지도자들은 동독 호네커의 서독방문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애원하며 매달리지 않았으며 의연히 대처했다.

독일통일은 자유, 인권, 자결 그리고 민주주의의 승리이다. 즉 몰가치적 통일이 아니라 가치적 통일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칙이다. 그러므로 김정일 답방으로 통일이 가까워진다는 환상은 갖지 말아야 한다.

현재의 혼란과 비정상적 대치상황은 한 가지 점만 교정한다면 극복될 수 있다. 그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마음을 비우고 김정일 답방을 서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 민심의 소재를 재점검하고 국내·국제정치를 다시 설계하는 것이다.
/성균관대 교수·경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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