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을 떠난 지 벌써 8년. 그동안 김일성 주석도 사망했고, 두 차례의 대홍수로 경제사정은 무척 어려워졌다고 하지만, 오늘 김대중 대통령이 분단 55년 만에 찾아간 평양의 모습은 예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 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은 내가 졸업한 뒤 ‘상급교원’(전임강사)으로 있었던 김일성종합대학과 합장강을 사이에 두고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80년대 후반 어느 해 여름, 평양에 큰 비가 와서 대동강의 지류인 합장강이 범람해 주변의 과수원이 망가졌으며 인근의 백화원 영빈관도 피해를 봤다.

이 영빈관이 건립된 것은 83년 무렵이다. 한 해전 김일성의 환갑 때 전 세계에서 국빈(국빈)급 손님들을 초대, 주암산 초대소, 고려호텔 등에 묵게 했으나 공간이 협소했다. 이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백화원 영빈관을 짓게 된 것이다. 자재는 대부분 수입품이며, 북한산 가구도 재료는 수입한 것들이다. 내 기억으로는 84년 방북한 양상쿤(양상곤) 중국 국가주석이 첫 손님이었을 것이다. 총리급으로는 고위급회담 당시 남측 대표들이 유일하게 여기서 묵었다.

김 대통령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난 만수대의사당은 중국의 인민대회당을 본뜬 것이다. 70년대 만수대의사당은 지금보다 규모가 작았다. 순수하게 의회 건물로만 사용됐다.

그런데 김일성이 중국을 다녀와서 인민대회당처럼 외국 대표단과의 회담 장소로도 사용될 수 있도록 확장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80년 노동당 6차 대회 이후에 김일성이 내각 수상 당시 쓰던 건물과 의회 건물을 통합해 지금의 만수대의사당을 지은 것이다.

인민문화궁전은 서울의 세종문화회관과 유사한 건물이다. 각종 국제 세미나와 토론회, 문화행사, 영화상영 등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건물들을 ‘대기념비적 건물’이라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자랑으로 삼고 있다. 주체사상탑, 인민대학습당, 개선문 등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이러한 건물 관리는 철저하다.

손님이 있건 없건 늘 깨끗하게 청소해야 하고,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시찰 코스에 빠짐없이 포함된다.

/ 조 명 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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