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교토대 교수 나카니시 데루마사(중서휘정)

새뮤얼 헌팅턴 등의 지적대로 21세기 초반 국제사회의 권력구조는 ‘유니-멀티(uni-multi)’ 상황, 즉 ‘일극-다극’ 구조가 될 것이다. 강대국이 이중화돼, 하나의 초대국이 있고, 그 밑에 작은 복수의 대국이 병존하는 상황이 예상된다. 유일한 초대국은 물론 미국이다. 그 밑의 대국 그룹엔 중국과 유럽, 러시아가 포진하고 일본과 인도 등도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 이후엔 미국과 다른 대국 사이의 차이가 좁아진다. 미국은 초대국으로서 지위와 영향력을 점차 잃어갈 것이다. 급기야 다른 여러 대국과 큰 차이가 없는 ‘보통의 강대국’으로 격하될 것이다. 미국이 보통의 대국으로 변하는 시기는 2050년 전후가 될 것으로 본다.

대국 그룹도 두 갈래로 갈라진다. 미국 쪽으로 상승하는 국가와, 밑으로 추락하는 국가가 뚜렷이 구분될 것이다. 중국은 미국에 근접하게 부상하는 수퍼파워가 될 가능성이 높다. 2000년대 국제질서와 미국의 미래를 조망하는데 ‘글로벌리즘’과 ‘주권 국가론’개념은 유용한 도구다. 피터 드러커가 말했듯이 근대사는 ‘글로벌화’와 ‘주권국가’간 상호작용의 역사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미국의 글로벌리즘이 주권국가들의 존재와 의의를 어느 정도 저하시키느냐가 큰 관심사항이 될 것이다.

21세기 미국은 미국이란 국가는 과연 부상하는 주권국가의 자기주장을 충분히 제압할 만한 힘을 보유할 것이며, 진정한 글로벌리즘을 구현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98∼99년에 걸쳐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은 이 물음의 해답을 구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98년 여름 러시아를 중심으로 번졌던 세계 금융위기는 글로벌화가 ‘역사의 다이너마이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글로벌화한 세계가 “과거 어느 때보다 세계공황이 일어나기 쉬운 세계”(폴 크루그먼)가 됐다는 일례였다. 같은 해 8월 인도-파키스탄의 핵-미사일 실험(아울러 북한의 사실상 핵보유)은 냉전후 미국의 안전보장전략의 핵심이던 ‘대량파괴무기 불확산’ 체제의 근저 자체를 흔들었다. 코소보 공습도 마찬가지다. ‘팍스 토마호키아(미사일 이름)’ 쯤으로 부를 수 있는 19세기식 ‘함포(함포)외교’의 재현일 수는 있어도 문제 자체의 해결로는 이어지지 못했음이 점차 입증되고 있다.

유럽 공동통화 ‘유로’ 출범은 미국 입장에서 딜레마와 같은 존재다. 유로의 실험이 성공할 경우 달러 지배에의 도전’이 될 것이고, 실패하면 유럽통합의 좌절 내지 폐쇄적 블록을 형성하는 일대계기를 만들수 있다.

물론 미국이 보유한 ‘파워의 잉여(잉여)’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미국의 힘의 우위는 3가지 기둥으로 구성돼있다. 군사력의 우세를 최종적으로 보증하는 ‘우주의 지배’, 경제-금융-국제기관에서 우위를 보증하는 ‘정보와 의제(의제)의 지배’, 영상과 심벌조작을 통해 가치관에 영향을 끼치는 ‘마인드 지배’가 그것이다.

이같은 3종의 지배구조는 21세기초에도 여전히 유효해 미국의 장기에 걸치는 우월을 보장해주는 역학기반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일극체제 만큼 위험한 것은 없음이 분명하다. 근대사에서 경제의 글로벌화가 어느 정도 이상 진전을 보면 반드시 ‘국가’ 진영의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세계질서는 국가적 경쟁의 시대로 전개됐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식민지라는 ‘주변’이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 경제의 글로벌화가 세계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구체적으로 전망하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신속하고 목소리가 큰 쪽이 이기는’ 포스트 냉전의 현실 속에서는 정치적인 수단과 영향력이 게임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가 된다. 그럴수록 필연적으로 국가라는 존재가 주도권을 발휘해 대응해가는 쪽이 효과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정부에 의한 국내경제의 주권적 관리능력은 대폭 저하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정치적 의미의 ‘세계의 일체화’를 초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격렬한 정치경쟁의 시대’가 부상한다. 국내에 있어서 ‘정부의 퇴각’은 세계 전체로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의 부상’을 가져다줄 것이다. 주권국가라는 틀은 21세기 세계질서에서도 여전히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냉전 이후 대략 5가지 방법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①‘역사의 종언론’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축으로 세계의 일체성이 급속히 정착돼갈 것이란 세계상을 그린다. ②‘문명의 충돌론’은 세계의 분열과 문명간 대립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③인권과 가치관의 글로벌한 공유에 의한 ‘지구촌적 세계상’을 그리는 시각과 ④경제중심의 지역통합을 강조하는 ‘지역협력이 진전되는 세계론’ 등도 제시돼있다.

⑤그리고 헨리 키신저를 비롯한 전문가 그룹의 세계관찰자들은 ‘메이저 파워(주요 강대국)들로 구성되는 세계’를 제시한다. 21세기 세계는 미국-중국-러시아-유럽-일본-인도(경우에 따라선 중동 이슬람연합) 등의 대국 내지 주요 세력간 협력과 경합, 세력균형에 의해 방향이 결정될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같은 5가지 개념적이고 전형화된 세계질서상은 저마다 미래조류의 일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질서에서 주권국가가 지닐 ‘중심성’을 경시했다는 점에서 ①∼④는 모두 부적절하다.

과연 21세기 미국은 진정한 일극 글로벌리즘을 구현할 수 있는가. 나의 판단은 ‘No’다. 중장기적으로 미국은 ‘일극 지배력’을 점차 상실해간다.

문제는 일극지배를 이어가려는 미국의 의욕이 저하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신(신)고립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이 그랬듯이 국제적으로 우월한 파워를 지니는 국가는 도리어 국내정치가 불안해지는 경향이 있다. 미국도 이미 그런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극구조가 계속될수록 주변국과 마찰도 빈번해진다. 일극으로 군림하는 초강대국에 대해 주변국이 단결해 반대-반발하는 파워를 형성할 것이다. WTO(세계무역기구) 시애틀 회의는 그 선구적 징조에 해당된다. 반발에 부닥칠 수록 미국은 고립주의에 빠져들고, 국제질서의 책임에서 피해버리려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과거 로마도, 대영제국도 그랬다. 중장기적으로 부상하는 메이저파워들이 경합을 벌이는 과정에서 미국의 일극성은 약해질 것이다. 그 결과 세계는 ‘다극성과의 공존’을 강요당하게 되고, 세계질서는 ‘유니-멀티’에서 ‘멀티(다극구조)’의 세계로 이행할 것이다. /정리·동경=박정훈기자 jh-park @chosun.com

◆약력

-47년 오사카 출생

-교토대학 법학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부 대학원

-미국 스탠포드대학 객원연구원

-미에대-시즈오카현립대 교수

-95년이후 교토대 종합인간학부 교수(국제정치학)

-저서= ‘아시아는 어떻게 변할까’ ‘회귀하는 역사’ ‘대영제국 쇠망사’(97년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수상) ‘국가는 왜 쇠퇴하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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