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源 /세종대교수·국제정치학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기나긴 러시아 방문은 그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공산당 1인 독재체제를 세습받은 북한의 지도자라는 점을 실감나게 했다. 국정현안이 산적한 민주주의 국가의 정상들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여유자적한 모습으로 방탄 기차에 관료들을 싣고 다니는 모습은 세계인들로 하여금 스탈린, 김일성, 그리고 사회주의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1945년 이후 현재까지 북·러 관계는 ‘이념’, ‘중국’, ‘한국’ 등의 변수에 따라 때로는 절친한 맹방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치밀하게 서로를 견제하면서 발전해왔다. 예컨대 1950년대 구소련은 ‘국제공산주의의 확산’ 정책에 입각하여 북한을 동북아 남진정책의 교두보로 삼아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구소련이 해체되고 한국과 러시아가 공식 수교한 1990년대에는 북·러 관계는 제로선상에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러·북 친선우호협력 신조약이 체결되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면서 해빙 무드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방문형식의 ‘특이성’으로 말미암아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은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었지만, 내용 면에서는 기존의 선언과 조약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정치·경제·군사적인 문제를 두루 망라하면서 북한은 러시아에, 러시아는 북한에, 서로 영향력 있는 존재라는 것을 선언적으로 확인시켰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철수’라는 어구로 인해 여야의 논쟁이 가열되고 국민들이 극심한 혼란을 느끼는 것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주한미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며,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쌓아왔던 북한에 대한 신뢰가 일시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발 주한미군 철수 발표를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논쟁을 벌일 일고의 가치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 내용은 지난해 7월에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발표한 공동선언문에서 ‘통일문제를 한민족이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총론으로 다루었던 것에 ‘주한미군 철수’라는 각론을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도 한국전쟁을 일으켜 한반도에 미군을 끌어들인 원인제공자가 바로 북한이다.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이 한국전쟁을 주도했다는 것은 각종 사료들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났다.

주한미군은 한반도 점령을 목적으로 미국이 임의로 주둔시킨 것이 아니라, 북한의 침략 방지를 위해 1950년 UN총회의 결의와 1953년에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하여 파견돼 있다. 미군의 한반도 주둔과 철수는 한·미간의 양자동맹에 의한 결과이므로 근본적으로 북한이 개입하거나, 러시아의 동의를 구할 사안이 아니다.

또 ‘주한미군 철수’라는 이슈는 미사일 문제처럼 최근에 갑자기 돌출되거나 심각성이 포착된 사안도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지난 50여년간 북한이 일관되게 주장한 내용이므로 미국을 향한 새로운 협상 카드도 될 수 없다.

김 위원장의 해외순방과 일련의 외교활동이 북한의 당면과제인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러시아처럼 개방을 단행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북한의 움직임에 귀 기울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굶주림에 지친 수십만명의 주민들이 북한을 탈출하고, 부채 상환 능력이 없어 시베리아 벌목장에 북한주민 수천명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상황에서도, 군수산업체를 견학하고 무기 구매에 열을 올리는 김 위원장의 태도는 북한의 진의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김정일 답방과 같은 정권의 업적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국론의 분열을 막고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저력을 길러야 한다. 언제까지 변화무쌍한 김정일의 말 한마디에 온 나라가 분열하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일을 반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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