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핵심인사가 지난 4월 말 작성했다는 「향후 정치일정」이라는 비밀문건은 한마디로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개헌과 3당 통합, 그리고 대통령 선거 등 국내 정치전략에 이용하자는 것이 그 골자다. 집권측은 이에 대해 「황당한 내용」이라며 펄쩍 뛰고 있다.

그러나 작성자는 다름 아닌 당 총재의 조직담당 특보인 현역 의원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 문건이 실제로 어떻게 활용됐고 기능했는가 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는 집권측 핵심이 그동안 내년 대선까지의 정치일정을 놓고 무엇을 생각했고 탐색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문건은 글자 그대로 우리 정치가 다시는 범해서는 안 되는 「금기」를 압축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선 「대통령 선거용 개헌」이 그것이다.

지난 권위주의 정권들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정권 재창출과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을 누더기처럼 만들어온 과거의 얼룩진 정치사를 「국민의 정부」하에서도 재생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정말 기막힌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남북문제를 국내정치에 이용하는 문제를 집권측이 그동안 쥐도 새도 모르게 연구·기획해온 게 아니냐는 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기회있을 때마다 『남북문제와 통일문제를 국내정치에 이용하면 안 된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이 문건내용은 정확히 그 반대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으로 평화협정 체결 등 가시적 성과를 거둔다면 개헌의 기폭제 역할을 할 것….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않는 한 현행헌법으로 대선을 치를 수밖에 없음….

3당 통합은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시기를 보고 추진….」 운운한 것들이 한마디로 「3당통합」에서 「개헌」까지의 모든 주요 정치일정을 「김정일 답방」에 매달고 있는 것이다. 결국 햇볕정책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이른 시일 안에 김정일 답방 등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하며 그래야만 정권재창출 등 모든 숙원이 풀리게 된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김 대통령은 작년 여야 영수회담 자리에서 『국민투표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또 지난달 민주당 외곽단체인 새시대전략연구소는 「통일헌법」을 공론화시키는 세미나를 열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들은 이번 문건내용이 「황당하고 유치한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남북문제를 개헌으로 연결하고 대선 필승전략으로 활용하는 식의 정치가 정말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나라와 현 집권측을 위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불러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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