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북·남북관계 순탄치 않을듯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4일 정상회담 후 발표한 ‘모스크바 선언’은, 향후 미·북관계와 남북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번 ‘모스크바 선언’을 통해 1972년 미·소 간 체결한 요격미사일 제한조약(ABM) 지지 입장을 밝히면서 북한의 미사일 계획은 자주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미사일방어 계획을 추진하면서 북한 미사일을 엄격히 검증하겠다는 미국에 대해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이란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수준이지만, 김 위원장은 이번에 한 발 더 나아갔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공식선언문에 포함시켜 공론화를 시도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미·북 간 의제에 재래식 무기를 포함시킨 데 대해 대응카드로 내놓은 측면도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북한이 향후 미국 부시 행정부와의 게임에서 ‘벼랑끝 전술’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강경자세를 천명한 것이란 분석이다.

물론 이런 북한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부시 행정부가 호락호락 말려들 가능성도 없다. 따라서 미·북 대화는 당분간 답보상태를 면치 못할 전망이며, 남북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김 위원장은 이번에 미국에 대한 대결적 노선을 천명한 것 이외에도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이뤄냄으로써, 북·중·러 3자 동맹 관계의 복원을 위해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남북문제의 ‘자주적 해결’, 미사일 계획 등에 대한 러시아측의 이해를 이끌어 냈을 뿐만 아니라, 선언에 “국제관계에서 독립과 자주권, 영토 안정의 철저한 보장”이란 대목을 포함시켜 러시아로부터 유사시 체제보장에 대한 길도 확보했다. 그는 또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본격적인 경제지원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냈으며, 특히 전력의 ‘우선 지원’ 약속을 보장받았다.

이로 미루어 김 위원장의 이번 러시아 방문 목적은 강경한 부시 정부와 당분간 대화의 문을 닫은 채로, 러시아의 외교·경제적 지원을 확보해 힘을 비축하겠다는 데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의도는 내달 평양을 방문하는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과의 회담을 통해 중국의 지원마저 확보하면 보다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이런 접근은 결국 벽에 부닥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특히 “북한 체제보장이나, 경제회생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엔 러시아와 중국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곳은 남한밖에 없고, 북한의 체제를 궁극적으로 보장해줄 수 있는 세력은 미국이란 점을 북, 중, 러 3자가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여건만 조성되면 북한이 대화로 돌아설 것이란 기대이다.

당국자들은 또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푸틴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서울 답방’을 권유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 정부의 기대일 뿐, 대화국면으로의 조기 전환을 위해 북한이 우리 정부처럼 ‘시간’을 의식하고 있다는 징후는 잡히지 않고 있다.
/ 김인구기자 gink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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