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김정일 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치고 발표한 공동선언은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8개 조항으로 된 북·러 공동성명은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등 원론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나 전반적으로 미국과 한국을 겨냥한 새로운 동맹질서를 구축하려는 것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공동선언에서 북·러 양국은 요격미사일 제한조약을 준수할 것을 밝혀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 방어체계에 대항해 공동대응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북한의 로켓 계획은 “평화적 목적을 띠고 있어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는 국가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러시아는 이런 북한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북한이 주한미군 문제를 다시 들고 나온 데 대해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북한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양해하고 있다는 한국정부측의 그간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드는 대목이며, 향후 한반도 문제에서 주한미군 문제가 여전히 핵심적인 변수로 작용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러 공동선언은 또한 6·15 선언에 따라 “통일문제를 조선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조선인민의 노력”을 지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외부간섭없는’ 남북대화가 지속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통일을 지향하는 주체가 ‘조선인민’이라고 한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비록 ‘인민’이란 용어는 북한이 상례적으로 쓰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통일문제를 남·북 ‘인민’ 간의 ‘자주적’ 문제로서, 그리고 남·북대화를 남·북 ‘인민 간의 대화’로 보고 있는 그들의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외부간섭 없는’ 남북대화를 강조한 것도 한·미 동맹을 격리시키려는 북한의 전략이 아직도 유효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번 공동선언을 통해 북한은 남북대화, 주한미군 등에 관한 그들의 공식입장을 어느 정도 내보였다. 문제는 북한의 진짜 속셈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김정일의 서울답방을 위한 초석용이라고 하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남관계에서 얻을 것을 얻어낸 김정일이 미국을 견제하려는 푸틴을 이용해서 또다른 승부수를 던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러시아도 그들이 북한과 함께 ‘한반도 게임’을 할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시베리아 철도사업 등에서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북한에 일방적인 선공(先供)을 해주면서 김정일 답방만을 고대하던 현정부는 이같은 북·러의 움직임에 비추어 그동안 우리측이 무엇을 후득(後得)했는지 냉철하게 따져 볼 일이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