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욱 /아주대 교수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또다시 미궁에 빠져들고 있다. 우리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또는 공개적으로 확인하거나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던 ‘9월 답방 약속설’마저 사실상 물 건너갔다고 할 수밖에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달 말 김 위원장이 러시아 방문을 끝내고 귀국하면 9월에는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의 평양방문이 예정되어 있고 10월에는 상하이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부시 미 대통령 방한 등의 일정이 겹쳐있어 김위원장이 서울에 온다고 해도 그 이후에나 가능한 실정이다. 김 위원장의 답방이 왜 이렇게 늦어지고 있는 것일까? 과연 답방 그 자체가 성사될 수는 있을까?

답방이 늦어지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미국의 대북 강경 정책이다. 부시 행정부의 미·북대화는 조건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북한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들이 딸려있다. 핵 의혹 해소를 위한 사찰이 강화되었고 미사일문제도 확실한 검증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 재래식 군사위협해소 역시 미·북협상의 새로운 장애물로 등장했다. 대화재개를 위한 예비접촉이 있었지만 진전 없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둘째, 남한 내부의 사정이다.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급격히 하락했고 전력지원 등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경제적 대가의 실현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고 있다. 특히 북한의 무성의에 대한 국내 여론 악화로 인해 답방이 실현된다해도 이를 거국적으로 환영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점을 누구보다 북한이 잘 알고 있다. ‘절대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김 위원장이 이런 어색한 분위기에서 남한을 방문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셋째, 북한 내부 사정을 꼽을 수 있다. 북한 내부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고 있다는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정상회담을 주도했던 김용순이 금년 초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그가 실각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또한 작년 김정일의 특사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했던 조명록의 행방에 대해서도 심각한 병을 앓고 있어 외국에서 치료 중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의혹의 사실 여부를 떠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모두 최근 정책결정의 일선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남한을 상대로 하는 북한의 남방 유화정책이 후퇴하고 그 대신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북방관계를 다지는 강경노선으로 대외 정책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직은 김정일의 답방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며칠 전 북한을 방문한 유럽 어느 국가의 고위 외교관에게도 북한 당국은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 위원장의 서울방문은 이루어 질 것이라고 확인했다고 한다.

다만 그 확인의 강도가 전보다 많이 약해졌으며 여전히 미국의 대북강경정책을 비난했다는 것이다. 기본노선의 변화라기보다 아직은 유리한 협상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전술적 변용을 시도하는 단계라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제는 우리의 대응이다. 무엇보다 답방을 간청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국제적 여론에 호소하는 것 역시 반드시 바람직한 대응은 아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답방이 실현된다고 해서 남북관계에 또 하나의 역사적 돌파구가 뚫리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답방이 실현되지 않는다 해서 한반도에 당장 무슨 큰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답방이 갖는 주된 의미는 그 상징성에 있다. 실현되지 못한 상징성은 불신을 초래할 뿐이다. 답방은 북측이 민족 앞에 행한 스스로의 약속을 이행하는 도덕성의 문제이다. 보다 느긋한 태도로 북한에 대해 민족적 의무의 이행을 촉구하면서 남북관계의 실절적 변화를 하나 하나 차근차근 쌓아 나가는 것이 우리의 대응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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