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호·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장


1. 한가지 질문

만약 1년에 1만 명의 탈북자가 지금 한국으로 온다면 남한과 북한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할 수도 있는 일이다. 지금 중국에는 최소 수만에서 최고 수십만 명의 탈북자가 은신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중국돈 6만 위엔(한국돈 약 1000만원)만 손에 쥐면 어떤 방법으로든 한국으로 올 수 있다. 1만 명이면 천억 원이다. 우리 정부나 사회가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는 아니다.

이런 일이 현실화된다면 북한 체제는 심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거의 공황상태에 빠질 것이다. 1만 명으로 어렵다면 10만 명으로 늘릴 수도 있을 것이다.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만 가면 한국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북한주민들 사이에 알려지면 탈북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질 것이며, 북한 정권은 주민들의 탈북 저지에 모든 자원과 통치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경제난에다 이같은 정치-경제-사회적 체제 유지 비용까지 가중된다면 북한 정권은 견디기 힘든 내부압력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이것을 피하려면 진정한 개혁-개방의 길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한국은 어떨까? 현재 국내에 들어오고 있는 탈북자는 연간 수백명 선이며 전체 누적치가 1400여명에 불과하다. 탈북자 천명 중 겨우 한 명 꼴로 한국 땅을 밟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탈북자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마당에 수만 명이 한꺼번에 들어 온다면 한국 사회 역시 엄청난 소용돌이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들의 한국 정착 지원을 위한 행정적-재정적-사회적 비용을 놓고 일대 논쟁이 벌어질 것이며, 남한 주민과 탈북자들간의 심리적 갈등도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체제 붕괴냐 진정한 개혁 개방이냐의 절박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한국 사회가 남북한 주민이 어떻게 어울려 살 것인가를 현실의 문제로 고민하게 되는 이같은 상태는 실질적인 통일(또는 통합) 과정의 시작에 다름 아니다. 더욱 정확히 말한다면, 탈북자 규모가 수십만 명에 달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이미 우리가 원튼 원치않든 통일 과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대륙을 떠돌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는 수십만 탈북자들을 눈앞에 두고 한국 정부와 국민이 엉거주춤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근본 이유는 통일에 따른 위험과 비용을 감내할 의지가 부족하고 태세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정부의 소극적 대응

탈북자 문제는 단순한 인권 차원을 넘어 북한 체제의 안정성과 한국의 대북-통일전략, 중국의 대(對)한반도정책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끼치는 고도의 정치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 그 해법이 단순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북한주민들의 대량 탈북 사태가 한국과 국제사회에 알려지고 문제 제기가 이루어진지 거의 10년이 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시도되지 못한 채, 탈북자 규모가 수십만에 이르고 많은 문제점들이 누적, 표출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도 여기에 기인하는 바 크다.

러시아의 북한벌목공 탈출사태를 계기로 탈북자 문제가 본격 제기된 90년대 전반, 당시 김영삼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확고한 원칙을 정리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처음부터 북한과 국제사회에 우리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각인 시키는 데 실패했다.

탈북 벌목공의 국내 수용문제와 관련 정부 방침이 '전원 수용'과 '선별 수용' 사이를 오락가락했고, 김영삼대통령은 중국방문(94년)에서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데려오지 않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탈북자 문제의 심각성과 앞으로의 전개과정을 통찰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첫 단계에서부터 우리 정부가 "탈북자문제는 우리 민족의 문제"라는 분명한 원칙을 천명하고 '전원 수용'의 단호한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했더라면 이후 북한이나 중국과 실무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서 우리의 입지를 보다 강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마당에 현재의 김대중 정부는 북한정권과 체제의 안정성 확보에 1차 목표를 둔 포용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북한정권을 자극하거나 북한체제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탈북자 문제에서 더욱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관찰된다.

현재 우리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이 탈북자 문제와 관련해 굳이 하나의 정당성을 갖는다면 북한 체제를 안정화 시킴으로써 탈북의 근본 동기를 억제하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장기적이고 효과가 불투명한 정책이라는 지적을 피할 길이 없다.

당장 외과적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놓고 체질 개선을 위한 한약재를 투여하고 있는 형국이다. 당연히 탈북자들의 중국내 체류 환경을 개선하고 한국으로의 입국을 용이하게 하는 데도 정책의 힘이 실려야 할 상황이지만 그 노력의 증거를 찾기가 어렵다.

한국에 정착했다가 중국에서 북한 보위부원들에게 납치돼 북한서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진 유태준씨 사건에 대한 정부의 수수방관적 혹은 오히려 북한을 변호하는 듯한 자세,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황장엽씨의 미국행을 적극 차단하고 있는 정부의 저돌적 행위등은 탈북자 문제로 북한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현정부의 생각과 행동이 도를 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다.

99년 12월에 발생한 '7인의 탈북자' 사건에서도 정부는 무의지 무능력 무기력에다 무책임까지 아무 부끄럼없이 표출했으며, 결국 그중 한 명이 스스로 재탈북해 입국함으로써 정부를 유구무언(有口無言)케 만들었다.

유태준씨 사건은 북한 당국이 그의 육성 기자회견을 라디오방송으로 내 보내 생존을 주장했지만 서울에 있는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목소리가 절대 아니다"고 밝히는 등 의혹 투성이임에도 정부가 철저히 묵살하는 태도를 보여 국내탈북자들의 분노를 사고 있으며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사건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는등 국제문제화되고 있어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가 필요한 사안으로 여겨진다.

우리 정부가 황장엽씨의 활동과 거취를 억압하면서 북한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은 앞으로 있을지 모를 북한 고위층의 망명을 사전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와 북한 정권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3. 달라지는 양상

최근의 정황들은 지금처럼 우리 정부가 탈북자 문제를 계속 뭉개고 앉아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해 나가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탈북 주민들의 규모가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당국의 국경경비 상황과 중국측의 단속 강도에 따라 탈북 규모의 증감이 영향을 받지만 그 누척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변화는 여러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경제나 식량사정이 호전됐다는 뚜렷한 조짐을 발견하기 어려우며(세계식량계획.WFP는 북한의 식량사정이 오히려 악화되고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따라서 탈북 행렬이 가까운 장래에 멈출 가능성도 희박하다. 탈북자가 이미 수십만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잠재적 폭발력을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내 탈북자 규모에 대해서는 통일부 1만~3만, 좋은벗들 30만명 이상, 탈북난민보호유엔청원운동본부 10만~20만, 윤여상 10만, 통일연구원 최소 10만 등의 추정치를 내놓고 있다.

국내의 탈북자는 6월30일 현재(1953년 휴전이후) 총 1633명이 입국해 현재 1410명이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 98년 72명, 99년 148명, 작년 312명이고 올해는 6월말 현재 226명으로 계속적인 증가 추세다.>

이제 탈북자 스스로 적극적인 자구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언제든지 국제사건화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번 장길수군 가족 북경 농성사건이 잘 보여주고 있다. 탈북자들이 중국이나 다른 제3국의 한국이나 외국 공관, 또는 국제기구 사무실에 진입하는 사건을 우리는 연이어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장기간 삶의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탈북자들이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길수군 가족 사건이후 중국이 탈북자들에 대한 대대적 단속을 벌여 1000여명을 북한으로 송환했다는 외신 보도는 우리 정부의 무기력을 또한번 실감케 하면서 문제 해결의 시급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탈북자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본격화하고 있는 사실도 우리 정부에게는 부담이다. 그동안 한국내 북한인권관련단체들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해오고, 한국 언론들의 탈북자 관련 보도가 축적되면서 탈북자 문제는 국제 뉴스거리로 충분히 성숙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여기에는 최근 북한이 서방국가들과 수교를 하면서 국제무대에 본격 등장하고 있는 정황도 작용한다고 보아야겠지만, 탈북자들이 겪는 대규모적이고 잔혹한 인권 말살 현장이 언제까지 국제 언론의 사각 지대에 묻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제인권단체들과 언론들의 탈북자 문제에 대한 인식은 경악 그 자체다. 뉴스위크지가 탈북자 문제를 특집으로 다룬 기사(3월5일자)의 제목은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이제 한국 정부와 사회는 서방의 지식인 사회와 언론이 제기하는 탈북자들의 인권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에 더 이상 답을 회피할 수 없는 순간을 맞고 있다.

현대 문명국가를 자부하면서 자기 민족이 저토록 대규모로 처절한 인권 말살 지대에 방치돼 있는데도 이토록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나라가 또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들은 이제 탈북자 문제가 한국정부의 대북정책 나아가 통일전략의 중심과제로 진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굳이 독일의 경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수십만 명의 탈북자를 한국 정부가 어떻게 국제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국내적으로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통일정책과 민족 통합과정의 '미니어추어(축소판)'이자 좋은 '연습의 場'이 될 수 있다.

4. 국외탈북자들의 참상

탈북자 문제는 탈북, 제3국(주로 중국) 체류, 한국 입국및 정착이라는 3단계 과정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과정은 하나의 컨베이어벨트 처럼 작동한다.

북한 주민의 탈북 동기 유발과 실제 탈북 규모는 북한 내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에 1차적으로 좌우되겠지만 중국내의 체류 여건과 한국으로의 입국 가능성 및 정착 여건 등에도 그 못지 않게 영향 받는다. 중국내의 체류 여건 역시 탈북자 규모와 한국으로의 입국 가능성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또 한국으로의 입국 난이도와 규모도 한국 정부와 사회의 수용 의지 못지 않게 탈북자의 규모와 중국 체류 여건에 크게 좌우된다. 따라서 탈북자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이 세가지 측면을 동시에 관찰하고 상호 연관성을 정밀 분석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중국내 탈북자들의 인권은 지구상의 그 어떤 난민이나 불법입국자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최악이다. 탈북자들의 대부분이 은신하고 있는 중국에서 이들은 법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추적과 단속의 대상이다. 중국 공안당국은 북한의 요청에 따라, 또는 자체의 판단에 따라 수시로 일제 단속을 벌여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강제송환하고 있으며, 그 법적 근거는 북한과 중국간의 '탈주자 범죄인 상호인도 협정'(1960년 체결)과 '국경지역 업무협정'(1986년)이 되고 있다.

중국이 북한으로 강제송환한 탈북자의 규모가 얼마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연간 5000명 이상인 것으로 관측된다. (1999년 12월 당시 권병현 주중 한국대사는 5000~6000 명으로 밝힌바 있으며, 중국 국무원 산하의 한 연구소도 96년 589명, 97년 5439명, 98년 6300명으로 파악한 적이 있다.)

어느 나라나 불법입국자를 단속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이처럼 집요하고도 대규모로 단속과 송환을 실제 집행하고 있는 국가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탈북자들의 중국 체류기간중의 삶은 전반적으로 보아 인간의 그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법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탈북자들은 중국인들의 낮은 인권의식과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인해 노예노동과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중국내 조선족들도 처음에는 이들에게 온정과 보호의 손길을 보냈으나 탈북자 규모가 늘어나고 장기화되는데다 중국 공안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점차 냉담해 지고 있다. 탈북자를 은닉하다 적발 될 경우의 벌금이 500~3000위엔(8만원~48만원)에서 최근 5000위엔(80만원)으로 늘었다는 보고도 있다. 위기 상황에서 보이는 탈북자들의 난폭한 행동이 조선족들의 경원 대상이 되기도 한다.

탈북자들 중에서는 중국 생활에 비교적 성공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의사 출신 등 일정한 기술을 가졌거나 중국내에 든든한 친척이나 후원 기관을 두고 있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탈북자 보호 및 후원단체들의 활동도, 최근 '좋은벗들' 관계자들이 중국 공안당국에서 가혹행위를 당하고 추방됐다고 폭로 기자회견을 가진 데서 드러나듯 갈수록 어려움에 부닥치고 있다.

자국의 불법출국자들을 집요하게 추적해 끌고가는 나라는 북한 뿐이다. 특별한 정치적 동기를 갖지 않고 중대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일반적 불법출국자를 체류국에서까지 추적하는 나라를 북한이외는 찾기 어렵다. 경제적 동기로 타국으로 불법출국한 자국민은 가능한한 그 나라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외교적 배려를 해 주는 것이 일반적 행태다.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나 베트남도 불법 해외 체류자들을 보호하면 했지 강제송환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중국 역시 한국에 불법 체류하고 있는 중국국적의 조선족들을 송환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북한은 중국내의 공관과 북한국적의 합법적 거주민(조교)은 물론, 중국내에서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는 보위부 요원들까지 총동원해서 탈북자를 색출해 송환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탈북자 신고에 상금까지 내걸고 있는 사실도 확인된다. 대개는 중국 공안이 체포하도록 해 북한으로 넘겨 받는 방식을 취하지만 보위부 요원들이 비밀리에 직접 북한으로 압송하기도 한다. 체류국의 억압에다 자국의 추적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은 탈북자들이 다른 어느나라의 난민이나 불법체류자들보다 열악하고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음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한국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한 탈북자들은 차라리 나라없는 유랑민보다 못한 형편인 것이다. 물론 북한 당국이 탈북자 전원을 적극적으로 북한으로 데려갈 각오인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미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준이 돼 버렸고 북한 당국으로서도 경제적 이유로도 그럴 필요까지 느끼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꽃제비들의 달러는 압수하지 말라는 북한 핵심부의 지시가 내려졌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이는 북한도 탈북자들에 대해 선별적 단속을 하고 있다는 징표가 될 수 있다. 단순히 식량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사람들은 체포되더라도 북한에서 비교적 경미한 처벌을 받은 사례도 확인 된다.

그러나 북한에서 주요 기관에 근무했던 사람, 북한으로의 복귀를 미루며 체제이탈이 의심되는 사람, 중복 탈출한 사람, 한국인이나 기독교 단체와 접촉한 사람, 한국행을 시도한 사람 등은 북한 요원들의 추적과 체포, 강제수용소 수감과 심한 경우 처형까지 각오해야 한다. 탈북인중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5. 독일의 경우

국외 탈북자문제는 궁극적으로 이들에게 어떤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이를 실효적으로 뒷받침 해 줄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현재 국제적으로 '북한 국적'의 '불법체류자'로 간주되는 이들에게 '난민'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게 하는 것이 한국 정부의 당면 과제로 비쳐지고 있지만 이것이 가까운 장래에 실현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난민 인정 여부는 체류국의 고유 권한으로 중국이 이들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 할 경우, 탈북자들은 중국내의 합법적인 체류를 보장받음과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국가로 출국할 수 있는 자유(물론 희망국이 받아들일 경우)를 획득하게 된다.

탈북자들이 정치적 난민이냐, 경제 난민이냐 하는 이론적 논쟁과는 별개로 현실적으로 중국이 이들에게 이같은 합법적 지위를 부여할지는 의문이다. 중국에는 탈북자 못지 않은 규모의 베트남인을 비롯한 다양한 국적의 실질적 난민들이 존재하고 있어 선례를 만들기 어렵다거나 중국이 북한 정권과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점도 현실적 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중국이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여기에 정책의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라는 요구가 국제 언론과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거세지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분단국의 대량 탈주민 문제는 독일의 선례가 거의 유일하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 서독은 헌법(기본법)에 '1937년 12월 31일 현재(히틀러 제3제국 등장이전) 독일제국의 영토하에서 독일의 국적을 가졌던 자 또는 그 배우자와 비속'은 독일국적을 갖는 것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동독주민은 물론 동구권의 독일민족들도 법적으로 서독국민으로 간주됐다. 물론 이들을 서독정부가 실효적으로 관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헌법정신과 규정을 실현하기 위해 서독 정부는 온갖 정책 수단을 동원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고(국제법상의 인정은 아니라는 서독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지만) 난 후에도 동독주민을 법적으로 서독 국민으로 대우하는 입장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물론 동독은 2개의 국적을 주장하며 이에 극력 반발했고, 동구권 국가들이 대개 동독의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서독의 '단일국적' 원칙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측면은 있지만 서독이 이 원칙을 포기한 적은 결코 없었다.

동독 주민들이 동구권 국가에서 서독행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벌일 경우 서독 정부는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접근했으며, 이것이 결국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가져온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더불어 서독은 동독은 물론 구소련과 폴란드 등에게 경제지원을 하는 대가로 독일인들의 서독 이민 쿼터를 꾸준히 늘려갔다.

이같은 서독의 자세는 게르만 민족국가의 정통성을 서독이 잇고 있다는 사실을 대내외에 분명히 천명하면서 독일인의 문제는 서독이 맡아 해결한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우리가 탈북자 문제에서 서독의 예를 그대로 따르기는 물론 여건과 현실이 너무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민족 문제는 한국이 책임진다는 원칙과 의지를 보다 분명하게 국제사회에 천명하고 이를 정책과 행동으로 뒷받침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국외탈북자 문제에 한국정부가 개입할 여지는 결코 넓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국과 러시아에서는 "한국정부가 정말 탈북자를 모두 받아들일 생각이 있느냐"고 비아냥대는 소리가 나온지 오래다.

6.국내 탈북자

한국 사회는 과연 수만 혹은 수십만이 될지도 모르는 탈북자가 한국으로 오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수용 태세가 돼 있는가. 지금으로서는 대답이 부정적으로 기울 수 밖에 없다. 현재 국내 탈북자는 1400여명. 이 정도를 우리사회가 포용하는 데도 힘겨운 소리가 나고 있다. 이들의 정착지원에 소요되는 경제적 부담은 차라리 부차적 문제일 수 있다. 현재 정부와 민간이 대북 지원에 쏟아 붓고 있는 자원의 몇 %만 할애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정부의 탈북자 정착 지원 체계도 제도적으로는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시행의 초반 단계인 만큼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앞으로 얼마든지 개선해 나갈 수 있는 기술적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정부가 탈북자 정착 지원과정에서 민간단체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유기적 협조를 모색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탈북자 정착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극히 기본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우리 사회 전체가 담당할 수밖에 없다. 국내 탈북자들이 호소하는 어려움도 당장은 경제적 문제에 집중되지만 점차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장벽과 편견, 그에따른 심리적 갈등으로 옮겨간다.

이들의 취업문제를 정부가 전적으로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며, 사회 각분야가 탈북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탈북자들중 전문 분야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이들이 한국의 해당분야에서 합당한 일자리를 찾아 자기실현의 기회를 갖는 경우는 드물다.

탈북자들이 겪는 교우관계의 어려움, 학교와 직장생활에서 겪는 갖가지 문화 충돌, 결혼 문제 등은 탈북자 자신의 노력 못지 않게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들을 이해하고 품어 줄 수 있는 성숙함을 갖추느냐에 따라 해소 여부가 좌우될 것이다.

현재의 상태에서 탈북자가 연간 수천 수만명 단위로 국내에 입국할 경우, 정부 차원의 지원 체계와 규모도 한계에 부닥칠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도 거부감 표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국내 조선족 문제가 이를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탈북자들이 얼마나 순조롭게 한국 사회에 소프트랜딩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치루어야 할 민족통합 과제의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인식이 시급한 시점이다.

7.대책의 모색

앞서 지적한대로 탈북자 문제는 탈북의 발생 원인과 추이, 3국 체류여건, 한국으로의 입국과 정착과정이라는 총체적 흐름속에서 종합적으로 접근해야하는 어렵고도 복잡한 과제이다. 여기에는 대북정책과 통일전략, 인권문제와 외교문제, 국내 사회복지정책 등이 함께 고려되고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한다.

1)북한당국과의 대화와 협상에서 탈북자 문제를 어떤 형태로든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고, 우선은 인권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제사회가 관심을 보이는 인권 사안에 대해서는 북한 당국이 겉으로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보다 신중해 진다는 것은 여러 사례에서 확인된다.

인권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이상한 침묵'은 북한 스스로 인권문제에 대해 무디어지게 만들 뿐이고 국제사회에서도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당장은 탈북자들에 대한 가혹한 추적 체포와 처벌을 문제 삼을 수 있으며, 유태준 사건은 구체적 사례로서 거론하기에 충분하다.

2)우리 정부는 서독이 통일의 순간까지 유지했던 '잘츠기터 문서보관소'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동독내에서 자행된 갖가지 인권 유린 사례를 그 자행자의 실명과 함께 기록하고 있었으며, 자료는 주로 동독 탈주이주민들로부터 수집됐다. 동독은 자신들의 코앞에 설치된 이 문서보관소가 내정간섭이라고 강력히 반발했지만 서독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 문서보관소는 동독에 대한 무언의 압력과 경고였으며, 통일후에는 실제로 인권유린자를 처벌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는 왜 탈북자들로부터 수집된 갖가지 인권 유린 사건을 기록한 문서들을 휴전선 근처 도시에다 쌓아둠으로써 북한에 무언의 인권개선 압력을 가하지 못하는 것일까.

3)유엔인권위원회를 비롯한 국제인권단체등을 통한 탈북자 문제의 국제여론화에 정부와 한국의 민간단체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연례 국제회의나 유엔청원운동본부의 1000만명 서명 달성 등은 국내외에서 탈북자문제에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다.

정부가 직접 나서기 곤란한 문제들에 대한 이같은 민간기구들의 활동을 정부는 직간접으로 적극 지원해야 한다.

4)중국 정부와의 실효성 있는 협상을 지속적으로 시도해야한다. 중국 정부가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하게 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겠지만 당장은 탈북자들의 신변 안전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외교력을 모아야 한다. 이를 대중 외교의 지속적 현안으로 부각시키면서 정부의 의지를 과시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구체적인 방안은 중국내의 한국 민간단체들의 활동 영역을 넓혀주는 방향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민간단체들이 중국내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지도와 배려를 하는 것도 정부의 몫이다. 필요한 경우 한국내 조선족 또는 화교에대한 정책을 중국내 탈북자 문제와 연계하는 방법도 강구해 볼만 하다.

5) 중국의 탈북자를 한국으로 데려오는 문제를 인도적 차원에서만 해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위험과 비용을 자선단체에만 부담시킬 수는 없다. 탈북자의 한국행을 주선하고 도와주는 상업적 행위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의미 부여가 필요하다. 서독은 동독 주민의 탈주를 도와주는 기업적 활동에 대해 동독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사실상 법적 보장을 해 주었다.

우리의 경우 중국내에서의 이같은 비공식 활동 공간을 넓혀 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 경우 상업적 활동에 대한 철저한 감독과 지도가 필수적임은 물론이다.

6)탈북자의 국내 정착지원 문제와 관련해서는 탈북자 대폭 증가에 대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이들의 교육과 보호를 맡을 전문 인력과 예산의 확충, 담당 부서간의 효율적 업무 조정이 필요하다. 탈북자 정착과정에는 각종 민간단체들의 참여를 더욱 넓혀 나가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유도해야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는 탈북자들이 일방적인 수혜대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점을 평가해 주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서독에서는 전후 경제기적을 이루는 데 수백만의 동독 이주민들이 적잖게 기여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국내 탈북자들은 한국민들에게 북한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하면서 '통일예비군'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8. 맺음

탈북자문제는 다양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어 이를 기술적으로 하나씩 풀어가려면 매우 복잡하고 힘든 과제가 된다. 그러나 통일전략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열린 마음과 과감한 자세로 접근한다면 의외로 해법은 단순할 수 있다.

무엇보다 탈북자 문제는 우리 정부와 사회의 부담이 아니라 기회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탈북자를 전원 수용할 의지와 태세를 갖추는 것만이 궁극적인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권의 활발하고 진지한 논의를 통한 국민적 합의 도출이 선행돼야 한다.

통일의 길은 통일헌법과 같은 화려한 청사진의 제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주어진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데서 열린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탈북자 문제는 단연 우리의 관심과 해법을 기다리는 최우선의 현실적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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