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조국을 떠나 사는 내가 이렇게 설레고 들뜰진대 지금 국내 동포들, 특히 반세기를 혈육과 떨어져서 단장의 아픔을 감내하며 살아온 이산가족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물론 나는 이 회담을 경하하기 위해 내 모든 수사(수사)를 동원하고 싶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덕담이 아니라 몇 마디 간절한 제언일 것이다.

우선 통일이 목전에라도 닥친 듯이 기대에 한껏 부푼 동포들에게 먼저 정서의 슬로 다운(완화)을 주문하고 싶다. 55년 동안 남과 북은 다른 머리와 다른 가슴으로 살아왔다. 우리는 우선 그 다른 만큼의 증오와 적개심이 우리 의식 안에 더께더께 먼지처럼 쌓여갔던 반세기 세월의 무게를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그동안 적대하던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가 평양에서 만나 환한 미소로 악수하고 껴안음으로 연기처럼, 깃털처럼 날아가 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너무 쉽게 망각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건너뛰면 이것 자체가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덫이 될 수 있다.

사소한 일에 괜한 울화가 치밀고 이해할 만한 사안에서도 분노가 솟구친다. “그들은 왜 이런가?”하고 말이다. 이런 정서가 자칫 모든 일을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내몰 수 있다.

정신의학적으로 볼 때, 그토록 오랜 시간 의식 안에 형성된 비우호적 정서를 다룰 때에는 섬세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그런 심리적 부담을 지닌 채로 협상의 마당에 들어서려는 대화 상대자들에게 최소한 두 가지 예비조건이 요구된다. 첫째는 차이를 가늠하는 예민한 감각이다. 다름, 차이, 거리가 최대한의 근사치로 측정되어야 한다. 55년의 세월 동안 이념의 벽 저편에서 갈등과 대립 속에 깊어져 간 골, 더구나 통제 불가능한 거대한 심층적 잠재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심연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둘째는 차이를 이해하는 공감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교육심리학자 콜버그는 마치 맹자의 가르침을 수정 없이 추종하는 듯한 논리로, 모든 윤리적인 문제해결은 역지사지(역지사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지사지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판과 잣대가 아니라 포용력과 상상력이다. 한마디로 하자면 간절한 사랑으로 상대의 처지에 대한 공감적 합일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나는 회담에 나서는 대통령과 그 실무자들에게 제언하고 싶다. 민족사에 영원히 남을 이 거사를 추진함에 있어서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은 좀더 솔직하고 투명해야 한다고. 행여 정치적 득실이나 당대에 회자될 공명심이나, 일대기를 장식할 무슨 상 따위에 연연하여 핵심 사안에서 실족해서는 안된다. 짧은 시간 안에서의 잃고 얻음을 따질 게 아니라, 만대로 이어질 이 땅의 후손들에게 남길 이해득실을 헤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넉넉하게 비우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작은 일에는 관용하되 큰 일에는 흔들림 없는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역사적인 회담을 지켜보는 남·북한의 모든 동포들,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에게 제안하겠다. 기대에 찬 성원을 보내되 환상은 버리자. 개인의 삶에서나 국가의 역사에서는 영원한 친구(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이것은 괴롭지만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진실이다. 국제정치의 역학장에서 우리의 운신 폭은 아직도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더디게 디딘 첫발자국에 지나지 않는다. 감격스러운 것은 그 힘든 첫발을 우리는 이렇게 자랑스럽게 내디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열매를 맛보려면 참으로 오랜 세월을 인내 속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이 중 오 뉴욕주립대 교수·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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