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黃長燁)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방미 문제가 한·미 간의 ‘장기 현안’으로 밀리고 있다.

한국 정부는 10일, 황씨의 방미를 위한 신변안전 보호 문제 등에 대해 곧 미국 정부와 협의에 착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마지못해 하는 구석이 역력하다. 미 국무부도 이 같은 한국 정부의 입장 때문인 듯, 황씨를 초청한 헨리 하이드(Henry Hyde) 하원 국제관계위원장 등 공화당 중진들과 한국 정부 사이에서 어정쩡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 국무부의 제임스 켈리(James Kelly)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이날 한·미 의원외교협의회 소속 한국 여야의원 7명을 만나 “미 의회가 원한다면 (행정부가)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한국 정치에 관여할 수는 없지 않으냐. 한국 정부가 결정할 일”이라고 말했다.

황씨를 미국에 보내느냐 마느냐는 것은 일차적으로 한국 정부에 달려 있다고 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미국 공화당 중진들의 황씨 초청 의지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데다 황씨의 방미 욕구가 강력해 계속 방미를 불허할 경우 부담이 크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와의 공식 협의에 나설 태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양국 간의 협의는 여론의 눈을 피해 철저히 물밑에서 진행되면서 상당한 시간을 끌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황씨를 초청한 미국 공화당 중진들에게도 황씨에 대한 신변안전 보호 문제가 해결되면 방미를 허락할 수 있다는 기존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초청 일정의 융통성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한국 정부는 이번에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와 공화당 인사들이 초청한 7월 방미 대신 오는 10월쯤 황씨가 방미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언질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탓인지 당초 한국 정부의 황씨 방미 불허 방침에 대해 반박 성명 등을 준비하려던 공화당 중진들의 입장도 당분간 관망세로 바뀌었다. 제시 헬름스(Jesse Helms) 상원의원의 보좌관인 짐 도란(Jim Doran)씨는 10일 “황씨의 방미 성사를 위해 노력하겠지만 조용히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황씨의 방미 문제를 미 의회와 한국 정부의 공개적인 실력
대결로까지 이끌어가는 것은 피하겠다는 자세인 셈이다.

황씨를 함께 초청한 수잰 숄티(Suzanne Scholte) 디펜스 포럼 회장도 이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지난 3월 황씨의 방미를 원칙적으로 허용한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미 의회와 협조해 황씨가 미국에 올 수 있도록 계속 작업을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양국 간의 협의가 어떻게 결말지어질지는 현재로서는 미지수다. 황씨의 방미 문제는 향후 남북한과 미·북, 한·미 관계의 복합적인 풍향을 잴 수 있는 가늠자 중 하나로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朱庸中특파원 midwa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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