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은 무엇보다도 남한과 북한의 적대관계를 해소하자는 것이다. 남한은 북한의 도전을 늘 의식해왔고 북한은 남한의 존재를 늘 껄끄럽게 여겨왔다.

그래서 전쟁도 했고 냉전도 겪었으며 체제싸움도 해봤다. 그 결과 남은 것은 상처뿐인 반 세기요 악몽 같은 50년이었다. 그동안 한반도에 살았던 개인이나 가정 치고 어느 한 부분 깨지고 찢어지지 않은 사례가 몇이나 될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 50년은 아버지들에게는 정치적 공포와 경제적 궁핍의 시대였고, 전쟁터 형들에게는 죽음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냘픈 어머니들의 형용할 길 없는 인고의 세월이었으며, 꽃 같아야 할 누나들이 피기도 전에 시들은 세월이었다.

사람들은 ‘남·북’을 이야기할 때 으레 정치·경제를 끄집어낸다. 물론 대단히 중요하고 불가결한 항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왜 우리는 ‘인간의 비극’은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것은 위대한(?) 정치·경제에 비하면 하찮은 문제라는 뜻인가? 정치·경제 때문에 남편을 잃은 아낙네들이 코흘리개 자식들의 입에 풀칠을 해주려고 죽을둥 살둥 벌레처럼 꿈틀거린 것이 지난 50년의 세월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정치·경제에 못지않게 ‘인간의 비극’에 대해서도 우선적인 해원(해원)의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남북정상회담을 ‘돈’이나 ‘물건’ 위주로 다루기 전에 먼저 한반도 50년의 ‘인간적 비극’이라는 문제를 통절하게 느껴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한낱 감상이 아니라 생생한 본질문제 그 자체다.

그러려면 우리도 북한도 이제는 ‘남·북’ 못지 않게 ‘세계속의 한국’과 ‘세계속의 북한’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면 무언가가 비로소 명료하게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의 환부(환부)와 ‘어글리 코리안’ 이미지를 씻어내지 않는 한 세계라는 낙동강에서 오리알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북한 역시 남한의 존재가 아니더라도 바로 지구사회라는 망망대해의 엄청난 파고(파고)를 더 의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도 북한도 이제는 ‘남·북 파도’뿐 아니라 ‘세계 파도 타기’에 더 주력해야 한다.

‘세계 파도 타기’는 한 마디로 좋은 의미의 세계적인 문명 잣대에 ‘각자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맞춰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각자 내부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인간적 비극’을 줄이는 일에 온힘을 쏟는 것이다. 좋은 의미의 세계적인 문명 잣대는 “아버지와 형들이 정치·경제의 이름으로 희생당하는 일을 줄이거나 없애라”고 말한다.

“어머니와 누나들이 아버지 잃은 자식 기르느라 온갖 수모를 다 당하는 일이 더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어린이와 노인과 환자들이 정치·경제의 이름으로 버림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한반도인들의 여망은 자명하다. 남북의 남정네와 아낙네, 어른과 어린이, 노약자와 장애인, 총각과 처녀들에게 마음의 평화, 안도의 미소, 개선(개선)에 대한 희망, 열린 공간을 기약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대번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첫술에 배부를 수도 없고, 그렇게 되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작지만 진솔한’ 다짐 하나다. “우리 이제부턴 한반도 사람들 마음고생 몸고생 시키는 일만은 없도록 만듭시다. ” 좋은 정치는 결국 ‘거창한 그 무엇’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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