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 전 유엔대사

황장엽씨의 방미는 끝내 무산될 것인가. 미국의회가 또다시 황장엽씨를 초청하고 이에 대해 황씨는 초청을 수락한다는 회신을 보냈으나 한국 정부가 이를 불허하기로 결정했다는 보도이다.

황씨를 보낼 것인가 말것인가. 여행의 자유는 헌법적 인권이고 황씨는 벌써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의 여행은 누구나 납득할만한 법적 근거에 의하지 않고서는 저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 정부는 황씨의 신변 안전 문제와 김정일 답방의 실현에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그의 방미 반대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논리가 빈약하다.

우선 신변 안전 문제라면 세계 민주국가 중에서도 가장 위상이 높고 그 위력이 막강한 미국 의회가 황씨의 신변 안전에 대해 이미 국무부의 전적인 협조를 약속받았다고 하니 그것으로 황씨의 신변안전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그이상 문제삼는 것은 궁색한 구실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김정일의 답방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김정일의 답방문제로 대한민국의 국가적 위신과 그 외교이익의 자주적 추구권이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북한은 7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황씨를 극렬하게 비난하고 나왔다. 이럴 때 우리가 또 겁을 먹고 두 손 들어 황씨의 방미를 가로막는다면 그야말로 대한민국은 국가다운 국가가 못되는 나라라고 비난받아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정 필요하면 김정일의 체면을 고려해 비공개 증언을 택할 수도 있다는 미국의회측의 이야기도 있다. 김정일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목을 마음대로 졸랐다 놓았다 하게 만들어서는 안되지 않는가.

황씨를 내보내주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그의 증언무대에 정부측에서도 햇볕정책을 옹호하고 주장할 수 있는 인사를 내세워 황씨의 증언을 반박하고 햇볕정책의 필연성도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 청문회는 으레 ‘양쪽 이야기’를 듣기를 원한다.

미국의회는 더 옳고 합리적인 대북정책의 수립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획득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KEDO사업에 대한 예산지원, 중유공급, 경제제재의 완화여부, 주한미국 주둔 수준과 비용 등등, 한반도 정책방향과 결정에 대해 어마어마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이 미국 의회이다.

황씨의 방미를 가로막으면 그것으로 문제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작년에 헬름스 상원의원이 외교위원장자리를 물러날 전후의 상황과는 다르다. 비록 현재의 상하원이 각각 다른당의 지배하에 있기는 하지만 미국 의회의 위신문제가 걸린 외교현안에 관해서는 양당 공조 정신이 강하다.

얼마 전까지 상원외교위원장이었던 제시 헬름스는 외교위원회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위원장으로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게 그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원의 하이드 국제관계위원장과 콕스 하원 정책위원회 의장은 하원의 외교정책을 좌우하는 자리에 있는 실력자들이다.

탈북난민 문제로 얼마 전 워싱턴을 방문하여 콕스의장과 면담하고 있을 때 러시아 외무장관이 우리 다음으로 그와 면담하러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 러시아, 중국, 일본을 위시한 세계의 모든 팔팔한 나라들은 미국 의회의 향배에 신경을 쓰게 되어 있다.

황씨 방미문제를 두고 한미 간에 갈등 조짐을 보이는 것은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은 동맹관계에 손질이 필요한 때이지 상처를 더 입힐 때가 아니지 않은가. 동맹외교를 여론몰이로 추진하는 것처럼 위험한 모험은 없다. 한미양국 간의 동맹은 김정일의 답방 전에도 후에도 오래오래 존속되어야 하는, 더 크고 높은 차원의 국가 이익이다.

우리 모두 국익의 우선 순위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필요로하는 시점에 와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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