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2일부터 평양에서 열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현동화(현동화·68·사업), 최인철(최인철·72·무직)씨가 느끼는 소회(소회)는 남다르다. 이들은 한국 전쟁 휴전후 남과 북 모두를 등지고 제3국 인도행 배를 탄 반공포로 76명중 현재 인도에 생존해 있는 2명이다.

인민군 중위 출신인 현씨는“1948년 4월 김구(김구)·김규식(김규식) 선생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가 생각난다”고 했다. 당시 16세였던 현씨는 이북 강원도 금화군에서 살고 있었다.

“갑자기 ‘타도 이승만·김구’라고 쓰여진 벽보들이 철거되고 제일 깨끗한 옷을 입으라는 등 북새통이 벌어지더군요. 시골 산간지방까지 말이죠. 얼마후 주민들간에는 김구선생이 교활한 김일성(김일성)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쫙 퍼집디다. ” 문득 요즘 평양에서 대청소가 실시중이라는 보도가 떠올랐다.

현씨는 “북한이 작금의 경제난을 피하기 위해 정상회담 제의를 받아들인 것일뿐 그들의 적화통일 야욕은 그대로”라면서 “52년전 실수를 되풀이할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곁에 있던 최씨도 “북한을 절대로 믿어선 안되며 그들의 사상도 무섭다”고 말했다. 당초 이들을 만날때 상당히 중립적(중립적) 시각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번 정상회담을 보통 한국인보다도 훨씬 강경하고 조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왜 부정적으로 생각하느냐고 묻자 “우리는 북한의 실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현씨는 “당시 인민군 입대도 위장이고 가면을 쓰지 않으면 이북에서 살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당시 남한의 젊은이, 엘리트들이 북한을 동경한 반면 북한 청년들은 오히려 남한을 동경했다고 전했다.

사진병 출신의 최씨는 1949년 12월 동짓날 “왜 팥죽도 안나오나”라는 농담섞인 투정을 한 사실이 밀고돼 6개월 뒤 자아비판대에 서고 영창에 들어가는 곤욕을 치른 뒤 북한 체제에 대한 정(정)을 끊었다고 한다.

최씨는 “북한은 이번 회담때 남쪽을 실망시키는 일보다 뭔가 받아들이는 척하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이들의 행태를 보면 5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데도 남한에선 그들의 계산과 속셈에 대해 너무 등한시하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이들이 1954년 2월 아스투리아스 호(호)를 타고 인도에 정착한 지 만 46년3개월여. 그동안 한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국민들의 불만감과 정부에 대한 비판은 여전하다는 게 이들의 시각이다.

현씨가 다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69년. “당시 가장 좋다는 반도호텔에 묵었는데 형편없더군요. 그때는 인도가 우리보다 훨씬 잘살았어요. ” “같은 민족끼리 오순도순 잘 살았으면 해요. 우리 정부가 이산가족 찾기나 경제적 원조를 통해 통일의 물꼬를 트는 것은 잘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체제 대결은 아직 안끝났다고 봐요. 북한은 일거에 만회를 할 노림수를 갖고 있을 겁니다. ”

전쟁의 상흔으로 인생 역정과 운명이 뒤바뀐 채 반세기 타향땅에서 살아가는 노(노) 인민군출신들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뉴델리=함영준기자 yjhah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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