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답방' 걸림돌 될까봐...

미 의회의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미국방문 초청에 대해 우리 정부의 입장은 “어렵다”는 것이다. 작년 11월 제시 헬름스 당시 하원 외교위원장의 초청과 지난 5월 미국 방위포럼재단(DFF)의 초청 때에도 정부는 같은 반응을 보였다. 황씨의 ‘신변안전’ 때문이라는 게 겉으로 내세운 이유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4일, “현재 여건에서 신변안전 때문에 보내기 어렵다”고 했으며, 국정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황씨) 방미문제는 그 특수성을 고려해 한·미 정부 차원의 신변안전 보장 등 사전에 충분한 검토와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도 “신변안전 보장은 의회가 아닌 행정부가 해야 하는데 초청장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고 말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러나 ‘신변보장’ 문제는 정부가 내세우는 ‘구실’에 불과하다고 외교 소식통들은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황씨가 미국에 가면 경호는 원칙적으로 미국측이 맡게 된다. 우리 정부가 크게 걱정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청장을 보낸 DFF측은 미 군용기를 이용한 미국 방문까지 검토하고 있으며, 하이드 하원 국제관계위원장과 콕스 하원 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도 초청장에서 각각 “귀하의 신변보장을 위해 우리가 미국 정부 내 해당기관들과 협력할 것”, “귀하의 신변안전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어떤 조치라도 취할 것임을 확신해도 좋다” 등 경호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탈북자의 미 의회 연설도 황씨가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변안전 보장 때문’이란 정부의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었던 강철환·이순옥씨도 정부의 협조를 받아 미 의회에서 증언했다. 물론 황씨가 노동당 비서를 지낸 북한 최고위층이란 점에서 경호상 두 사람과는 비교가 안되겠지만 북한의 테러 대상이라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정부가 황씨의 미국 방문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황씨가 미 의회에서 북한체제를 비판할 경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방문과 남북대화나 미·북대화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정부가 우려하고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실제로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3일 황씨에게 미국 방문을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방문 후로 연기했으면 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지난 99년 7월 북한이 황씨의 월간조선 인터뷰 내용을 문제삼아, 베이징(北京) 차관급회담을 무산시켰던 일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황씨가 미국에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 등 특급 비밀들을 털어놓을 때 생길 수 있는 파장 등도 고려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설도 나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초청이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 의원들이 주도하고 있고 황씨 역시 이번엔 반드시 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우리 정부가 황씨의 방미를 허용하지 않을 경우, 자칫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정부로선 미 의회 초청장에 “귀하의 방미문제와 관련, 한국 정부가 찬성의 의사를 밝힌 것도 환영한다” “김 대통령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 대목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정부가 어떤 명분으로, 언제까지 황씨의 방미를 저지할 것인지 주목된다.
/ 김인구기자 ginko@chosun.com

◇ 왼쪽은 미 하원의 헨리 J 하이드 국제관계위원장 등이 황장엽씨에게 보낸 초청장./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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