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옌볜의 한 조선족 집에 숨어 지내던 장길수군과 사촌 형제들이 일기를쓰고 있다.그 옆에는 길수군 등이 그림그리기에 사용한 크레파스가 놓여있다. /길수가족구명운동본부 제공

사흘째 중국 베이징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사무실에서 농성중인 길수가족 7명 중 한 명인 이화영(17)양의 일기가 28일 공개됐다. 장길수군의 이종 사촌인 화영양이 육필로 작성한 A4용지 40장 분량의 일기장에는, 몽골 탈출 계획이 좌절된 데다 한국 등지에서의 생활비 지원도 끊긴 지난 3월부터 5월까지의 도피 생활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이 일기는 중국에서 탈북 ‘길수가족’의 베이징 농성을 현장 지원하다 27일 입국한 ‘길수가족 구명운동본부’의 문국한(49) 사무국장이 중국에서 입수한 것이다.

화영양은 일기에서 답답한 도피 생활 속에 자유의 소망을 담아 학을 접고 있다며, “이 모든 환경 속을 벗어나게 하늘의 복이 내려 우리에게 자유의 세상이 차려질 수 있을까? 하늘이 내려다 보였으면…”(3월 1일)이라고 썼다.

3월 초 일기에서는 “한국으로 보내줄 사람이 있으니 이제 내려오면 대사관으로 해서 갈 수 있다고 한다”(3월 4일)고 들뜬 기대감을 보였다. 화영양의 일기에는 특히 베이징 농성의 주요 이유가 된 어려워진 생활고에 대한 호소가 많이 눈에 띈다.

화영양은, “이틀 전부터 생활비를 절약하려 떡국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4월 2일), “냉방인 집에서 모두가 동복을 꽁꽁 입고 있다. 오히려 바깥이 따스하다. 우리한테는 생활비도 없고 어떻게 할까. ○○가 (식량을 구하러) 북한으로 건너 가겠다고 했다”,

“집주인이 집세를 언제 내는가 물었다. 오빠는 일주일 있으면 반드시 되니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4월 11일)고 적고 있다.
일기에는 또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는 상황에 대한 분노가 여과없이 담겨 있었다.

화영양은 “○○가 잡혀 죽게됐다고 했다. 자유를 찾아 중국 땅에 와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 강제로 잡혀 죽게 된다는 것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3월 11일),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눈물을 흘리며 건너가고 있다. 하늘이 울고 바다가 성내고 땅이 갈라질 일이다. 자유의 길은 정말 힘들다”(3월 21일)고 적고 있다.

17세 소녀는 일기에서 “5월의 밤풍경이 참 아름답다. 한국은 더욱 아름답겠지, 무척 가보고 싶다”(5월 2일)는 말로 ‘한국행’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이뤄지길 기원했다.

한편 이날 ‘운동본부’측은 지난 1년여 이상 길수가족들과 함께 살며 이들을 돌봐온 재중국동포 20대 이모 여인이 작년 4월부터 7월까지 쓴 일기도 함께 공개했다.

이씨는 “가족들이 처음에는 매일같이 창문에 매달려 밖만 멍하니 바라보던 때가 언제냐 싶다”며, ‘갇힌 아파트’에서 생활한 지 한 달이 지나자 길수가족들이 집안에서 저마다 그림그리기, 책읽기 등에 몰두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적고 있다.

이씨는 또 길수군이 몰래 담배를 피는 것을 눈치채고 길수군을 호되게 나무랐지만 “꽁초를 주워 피웠다”는 말에 가슴아파하기도 했다. 이씨의 일기장에는 언제 실현될지 모르는 한국에서의 삶을 위해 길수가족들이 밤마다 영어 등 외국어 공부에 몰두하는 모습도 등장한다.
/박민선기자 sunris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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