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렉산드르 보론초프 - 러시아 동방학연구소 상임 연구원

북한 지도자 김정일의 5월 29~31일 북경 비공개 방문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에서도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첫째, 이른바 ‘평양의 은둔자’의 국제무대 첫 데뷔전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번 김정일의 5월 북경 방문과 6월 남·북 정상회담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일관된 대외 정책의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북한 지도부는 오래 전부터 ‘부분적’(전면적이 아닌)개방과 시장경제 요소 도입만이 북한 경제를 파국에서 구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이 처한 국내외 조건은 중대한 결정을 실행에 옮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상황이 바뀌었다. 첫째, 국제 여건이 개선됐다. 미국과의 건설적인 대화가 진행되고 있고, 올해 2월 러·북 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동안 냉랭했던 러·북 관계가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또 이미 이탈리아와 수교하는 데 성공, 서구 유럽과의 관계 개선의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 둘째, 국제사회의 지원 등으로 인해 식량 위기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셋째, ‘햇볕 정책’을 실시하는 김대중 정부가 한국 권력을 잡았다. 처음으로 북한에 비(비)적대적인 한국 정부가 들어선 것이었다. 즉 최근 북한 주위에는 개혁을 실시할 만한 평화적인 여건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또 김정일의 첫 외국 방문지로 중국이 선택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중국은 군사·정치 그리고 이데올로기 면에서 북한의 유일한 동맹국이다. 물론 한·중 수교 이후 약간의 껄끄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은 90년대 말 북한이 어려울 때 모든 분야에서 북한을 도와줬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북한에 가장 중요한 국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북한에 있어서 중국의 의미는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주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놀라운 경제 개혁을 이뤄낸 모델로서 중국은 또 다른 의미로 북한에 다가갈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이번 김정일의 중국 방문 프로그램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김정일이 ‘중국의 실리콘 밸리’라 불리는 북경 기술지대를 방문, 현지 컴퓨터 생산과 가격 등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장쩌민 국가주석뿐 아니라 주룽지 총리와 만났다는 점도 중요하다. 주룽지 총리는 확고한 시장 개혁의 주도자로 알려진 인물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5월 김정일의 북경 방문과 6월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이 어느 정도 여력과 자신감을 회복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내부 개혁을 위한 대외적 사전 정지 작업이기도 하다. 적어도 개혁이 체제 붕괴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 속에 중국식 경제 개혁을 실시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 조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정리=황성준기자 sjhwa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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