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들어 공안 특별단속 길거리 꽃제비들 모두 잠적


‘도망자’에서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이 돼 중국 땅을 다시 밟는 심정은 착잡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하던 중국 공안들로부터도 이제 한국인으로서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강철환 기자는
1968년 평양에서 태어나 조총련 간부였던 조부가 숙청되면서 77년부터 87년까지 함남 요덕 정치범수용소에서 생활했다. 92년 탈북, 한국서 대학을 졸업하고 북한의 강제수용소 실상을 국내외에 알리는 활동을 해 왔으며, 2000년 11월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 기자가 됐다. 저서로 ‘대왕의 제전’ ‘평양의 어항(영어·프랑스어판)’ 등이 있다.

지난 15일 밤 심양에서 연길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9년 전 탈북 때의 반대 방향이었다. 북한처럼 여행증 검열을 하는 줄 알고 공안원이 지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화장실도 못간 채 밤을 샜던 기찻길이었다. 새벽 2시쯤 떠들썩한 고함소리와 함께 뭔가 심하게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후 조선족 열차안내원이 옆자리에 앉아 “방금 북조선사람 3명을 붙잡았다. 남자는 족쇄를 채우고 여자는 그냥 가두었다”고 대수롭지 않은 듯 내뱉었다.

“왜 잡았느냐”고 묻자 요즘이 특별단속기간인데 누군가가 밀고를 했다는 대답이었다. 분노와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누군지 모르지만 무사하길 속으로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 7시 연길역에 도착해서 플랫폼을 빠져나오는데 아주머니들이 간밤에 붙잡힌 북한인 이야기를 하기에 물어봤더니 여자 두 명은 도망쳤고 남자도 아마 도망갔을 것이라고 했다.

단둥의 압록강에서 보트를 탔다. 북한을 좀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말에 안내원은 북한 쪽 해안으로 가더니 보트 시동을 꺼버렸다. 불과 3~4m 거리에 북한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물 속에 들어가 조개를 건지는 사람, 그물을 걷어 올리는 사람들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시커먼 얼굴, 조그만 체구…. 몇 사람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들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연길에서는 9년 전 나를 도와 주었던 생명의 은인들을 만났다.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다. 한 사람은 몰라보게 달라진 나를 잘 알아보지도 못했다. 이들은 98년 말까지만해도 연길역에 북한어린이들이 수십명씩 몰려다니며 구걸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대부분 어디론가 사라져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수십명의 ‘꽃제비’들이 언제나 몰려있던 연길비행장도 마찬가지였다.

올 초부터 탈북자 색출이 강화됐으며, 특히 6월에는 연길감옥 죄수 60명이 집단 탈주한 사건까지 발생해 공안당국의 집중단속이 시작됐다고 한다. 탈북자들이 자주 찾는 교회나 성당, 절에는 공안원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탈북자 색출에 나서고 있었다.

작년까지 공안당국은 탈북자를 돌려보내라고 경고만 하고 실제 제재는 잘 가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종교 시설에서 탈북자들을 돕다가 발각되면 막대한 벌금을 내거나 심한 경우 폐쇄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연길의 서(서)시장에도 대낮에는 탈북자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저녁 무렵 5명 정도의 탈북자를 한눈에 알아보고 접근했더니 순식간에 달아나 버렸다.

도문이나 개산툰 같은 국경지대의 산골마을에는 막 탈북한 사람들이 상당수 숨어 살고 있다. 접경지대에서 가게를 하는 한 조선족 아주머니는 “두만강을 건너 물에 젖은 채로 가게로 와 먹을 것을 요구하는 탈북자들이 한둘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 아주머니는 이들을 도와주고는 싶지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공안을 부르겠다”고 엄포를 놓아 내쫓는다고 했다. 조선족들도 이젠 탈북자를 돕는 데 지쳐있다는 것이다.

연길의 한 다방에서 미리 연락이 된 탈북자를 만났다. 평양출신으로 청진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일하다 반정부모의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보위부 지하감방까지 갔다온 사람이었다. 모진 고문으로 체중이 23kg이나 빠지는 바람에 예비사망판정을 받고 풀려나 극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 팔목에는 깊게 파인 족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의 신분을 밝히지 않다가 나중에 숙소에서 밝히자 그는 깜짝 놀라며, 북한에서 한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강철환의 요덕수용소 이야기’를 들으면서 북한의 실상을 잘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에 온 지 2년이 돼 가고 있었다. 처음 중국에 와서 짐승처럼 천대받으면서도 고발 당할까봐 아무 소리 못하고 일해야 했지만 지금은 북에서 배운 의술로 주위 사람들에게 침도 놔주고 약 처방도 해주고 있다고 했다. 그는 “중국돈 6만위안(약 1000만원)만 있으면 한국에 갈 수 있어 밤낮으로 돈벌이를 하는데 지금 3만위안 정도 모았다”고 했다.

청진출신으로 교사를 지냈던 29살의 리희순(가명)씨는 대부분의 탈북 여성들은 중국인들의 성노리개가 되거나 집에 감금당한 채 온갖 ‘노예노동’을 강요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전했다. 국경의 한 도시에는 북한 처녀들이 일하는 술집이 있는데 대부분 팔려온 여자들이라고 한다. 국경지대에서 3000~5000위안을 받고, 다시 내륙지방에는 1만5000위안에 되파는 식이다.

중국을 떠도는 탈북자들을 보면서 나는 한시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9년간의 한국생활 동안 내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가면서 나마저 이들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이었다. /연길=강철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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