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수 가족’이 26일 중국 베이징에서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실에 망명을 신청하기까지는 이들을 도와온 숨은 공로자들이 있다. 99년 8월 결성된 ‘길수가족 구명운동본부’다.

중국과 무역을 하다 길수 가족의 애끊는 사연을 듣고, 아예 구명운동에 매달리게 된 이 운동본부의 문국한 사무국장이 지난 15일 단신으로 중국에 들어가, 이번 일에 직접 간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내자동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사무실 한 구석에 책상 하나를 빌려쓰고 있는 구명운동본부에는 문의·격려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운동본부 황재일(29) 간사는 “운동본부 창립 이래 이런 관심은 처음”이라며 “베이징의 자세한 상황을 몰라서 중국에 있는 문 국장의 전화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문 사무국장은 이날 두 차례 전화를 걸어와 “결국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 가게 됐으며 길수 가족들은 온 몸을 줄로 엮고 ‘송환되면 자결하겠다’고 버티고 있다”고 베이징 상황을 전해왔다고 한다.

문 국장은 옌볜 등에서 길수 가족들을 돌봐온 조선족 여인과 함께 탈북난민들의 베이징 이동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운동본부 김동규(63·고려대 북한학과) 대표는 “두 달 전 몽골로 탈출시키려다 실패했다”며 “이번이 생존의 기로에 선 탈북자들의 마지막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장길수(17)군 가족들의 탈북은 함경북도 회령에 살던 외할머니가 지난 97년 3월 두만강을 넘은 것을 시작으로, 99년 1월까지 차례로 이뤄졌다. 탈북에 성공한 길수 가족은 친척을 합쳐 모두 4가족 16명이다. 이들은 중국 공안과 북한 공작원들의 눈을 피해 중국의 동북 3성을 떠돌며 피 말리는 도피생활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에는 길수 어머니 정순실(48)씨 등 5명이 중국 공안에 적발돼 북한으로 강제송환되기도 했다. 어머니 정씨와 친척 김광철(28)씨는 현재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다는 것이 운동본부측 설명이다.

길수군과 그 형 한길(20)씨는 북한 실상을 폭로한 탈북소년화가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본지 2000년 2월 16일자 > 그들의 그림이 최초로 공개된 것은 지난 99년 서울에서 열린 서울NGO 대회. 당시 출품된 그림 20점은 뉴스위크, 영국 TV 등을 통해 소개되면서 국제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최근에는 북한의 공개처형과, 인육을 삶는 장면 그림 20여점이 추가로 공개됐다.

운동본부측은 길수군 등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도피 생활에 필요한 경비조달이 한계에 부딪혔고, 또 한 달 전 몽골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중국·몽골 국경 경비가 강화되면서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최재혁기자 jhchoi@chosun.com
/ 박민선기자 sunrise@chosun.com

◇ 길수 가족 탈북 및 구명운동 일지
1997.3 ~ 99.8 길수 가족 15명 탈북
1999. 6 길수 이모 정명숙씨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한 송환
1999.10 서울 NGO국제대회에 길수 가족 크레용 그림 20여점 전시
1999.11.13 길수 가족 그림, 미국 뉴욕 UN본부 앞 거리전시회
2000.5.5. 북한실상에 대한 그림과 탈북생활기록을 묶은 ‘눈물로 그린
무지개’ 국내 출간
5.22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 일가족 소개
9.21 북경주재 UNHCR에 난민지위 인정 요구
10.19 영국 채널 4TV에 길수 그림 소개
10.20 영국 가디언지에 관련 기사 게재
2001.1.23 정명숙씨 북한 재탈출
3.20 길수 가족 5명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한 송환,
일부는 정치범수용소에 수용
6.26 북경주재 UNHCR에 난민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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