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빌 챔벌린이 영국 보수당 내각의 수상으로 취임한 것은 1937년 5월. 그는 1차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이 좀 심하게 당한 게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의 「뗑깡」이 부분적으로는 이유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이름도 유명한 대독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을 영국 안보의 대종으로 삼았다. 『우리가 참호를 파고 방독면을 쓴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황당하며 믿기지 않는 일이다… 나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고 독일에 또 가겠다.』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선 히틀러가 떼어달라는 체코의 수데텐란트를 내주자는 「오냐, 오냐」 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맺은 것이 뮤니히 협정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듬해에 수데텐란트를 넘어 체코 전역을 집어삼켰고, 그로 인해 챔벌린에겐 하루아침에 망신살이 뻗치고 말았다. 이 무렵 챔벌린 내각의 외상(외상)이던 앤서니 이든은 자기가 모시는 상사의 유화정책에 반대해 감연히 사표를 내던지고 나갔다. 『우리가 압력에 양보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발전은 결연한 국민적 기질에 달려있으며 그런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그러자 윈스턴 처칠이 이렇게 거들었다. 『대폭적인 물질적 양보와 자긍심의 굽힘으로 전체주의 권력에 영합하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 챔벌린의 소위 신(신) 외교정책이냐?』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든이나 처칠처럼 유화정책을 원천적으로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스티븐 록(Stephen Rock)이라는 학자는 클린턴의 대북 포용정책을 포함해 지난 세기의 일백 건(건)에 달하는 유화정책을 분석한 다음 이렇게 결론내리고 있다. 『유화정책은 나쁜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유인책(유인책)의 성격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상대방에 따라, 그리고 때와 경우에 따라 「오로지 당근(pure inducement)」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상호주의를 채택할 것인지, 또는 「당근과 으름장(threat)의 혼합」으로 갈 것인지를 적절히 골라야 한다는 단서(단서)만은 잊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남·북」은 어떤가? 한 마디로 김대중 정부는 고지식할 정도로 「오로지 당근」인 데 반해 북쪽이 오히려 「당근(정상회담)과 으름장(NLL 침범)의 혼합」이라는 융통자재한 수를 쓰고 있으니 기가 차다 할밖에 없다. NLL침범은 북한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이 시점에선 긴장완화 아닌 긴장조성쪽으로 일단 가겠음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받아먹을 것은 다 받아챙겨도 때릴 것은 때리겠다는- 그래서 지금으로선 『너희들 남쪽의 유화책이 우리의 「혁명적 원칙성」을 제약할 만큼 놀아주지는 않겠다』는 「선택의 자유」 천명인 것이다.

북한의 이런 의도된 긴장조성에 대해 필수적인 수준 이상의 과잉반응을 보이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정부가 이번에 드러낸 「속절없음」과 「당신은 야멸차도 나만은 일편단심」의 외곬정책 역시 과연 「햇볕」의 효과와 보람을 보장해줄지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총 쏴서 전쟁하자는 것이냐?』며 정부사람들은 신경질을 낸다. 그러나 매사에 왜 대안이 전쟁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가?

최소한 우리로선 「골프장이 아닌 곳에서」 더이상의 「금강산」이나 「당근」만은 유보한 채 그 쪽의 느닷없는 흔들기를 준절히 시비하고 으름장 놓을 수는 있는 문제 아닌가? 유화정책을 지지하는 스티븐 록 같은 사람도 『아니, 저럴 땐 「오로지 당근」이 아니라 「당근+으름장」으로 신축성있게 왔다갔다 해야 하는데…』 하며 의아해했을 성싶다. 도대체 이 정부가 왜 이렇게 여유도 배짱도 없이 외줄기 동아줄에만 매달리는 것일까? 그 이유가 만약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된」 묶인 처지 때문이라면, 그리고 『내 임기 중에 모든걸 다…』라는 조바심 때문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대책이 없는 재난이 아닐 수 없다.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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