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 중국·러시아 국경에서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체포돼 그해 12월 30일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강제송환됐던 탈북자 7명 중 김운철(가명·23)씨는 지난 4월 중국으로 다시 탈출한 직후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다음은 월간조선이 입수한 수기 요약./ 편집자

◆ 첫 탈북

1999년 11월 초. 중국 흑룡강성 밀산. 우리 일행 7명은 도보로 러시아로 향했다. 큰 형님이 러시아로 가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새벽 3시쯤 러시아 변방대(국경수비대) 다섯 명이 총부리를 돌리며 무엇이라고 말했다. 변방대원들이 하라는 대로 모두 손을 머리에 올리고 감옥으로 갔다. 감옥에 도착하자 러시아 변방대원들은 고무 방망이로 정신없이 때렸다.

8일 후 더 큰 감옥으로 옮겼다. (러시아)기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들 사진도 찍고 질문도 하였다. 우리는 『돌아가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 제발 조국(북한)에 보내지 말고 우리를 남인(南人·남한사람)으로 쳐서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 중국을 거쳐 다시 북으로

1999년 12월 30일 아침 감방에서 나와 손에 수갑을 차고 차에 올랐다. 한국에 보낼 거면 손에 수갑을 채우겠는가. 이건 조선에 보내는 거다. 우리는 운명에 목숨을 맡기면서 차에 올랐다. 우리는 중국 훈춘으로 넘겨졌다. 중국 경비대에게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매달렸다. 남자들은 다 죽어도 좋으나 누나(방영실·가명·35)만이라도 조선에 넘기지 말라고 애원했다. 누나는 그때 임신중인 데다 하혈을 해서 바지가 피로 얼룩진 상태였다. 북한 샛별로 넘겨져 북한 수갑으로 다시 바꿔 차고 청진 보위부로 옮겨졌다.

◆ 청진 보위부 지하감옥 생활

청진보위부의 예심에선 안한 일도 했다고 해야 하며, 만나지 않은 사람도 만났다고 인정해야 했다. 비둘기고문, 시계고문, 전기고문, 오토바이 고문,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 몇 번이나 고문에 못 이겨 까무러쳤다.

지하감옥에서 아침 5시에 일어나 청소 후 5시30분부터 감방 규정을 외우고 자기가 지은 죄를 반성했다. 7시 식사. 강냉이 50알에 소금물이 고작이다. 오전 10시 위생사업. 30분간 이를 잡았다. 모포를 뒤집으면 이가 줄지어 다녔다.

양반자세로 앉힌 채 말도 못하게 했다. 감방 한쪽 구석에 (감시)카메라가 있어 움직이거나 말을 하다가 들키면 살창에 수갑을 채워놓고 몇 시간 동안 감방규정을 외워야 했다. 더듬거리면 고무채찍으로 사정없이 후려 갈겼다. 자살할까봐서인지 숟가락도 손잡이는 떼내고 끝의 국자 부분만 주었다. 대변을 보고는 손바닥으로 닦아야 했다.

신입으로 들어가서 그렇게 했는데도 「계호」(간수)들이 더럽다며 핥으라고 했다. 세 번쯤 핥았다. 개나 다름없었다. 항문이 벌어져 대변이 나가는 감각도 모를 정도로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2000년 9월 초. 담당 지도원에게 「밖에 나가서 보위부와 감방 안에서 보고 들은 사실을 한 마디라도 할 때에는 공화국 헌법 10조1항에 의해 법적 책임을 진다」고 서약했다. 밤 10시쯤 고향인 무산군 보위부에서 온 지도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승용차에 올랐다.

◆ 다시 탈출, 제3국으로

지도원들은 나를 삼촌집으로 데리고 갔다. 보위부에 들어가기 전에 48㎏이었으나, 당시는 26㎏이었다. 자리에 누워서 중국 생각, 형님들 생각, 감방 생각을 하니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다가 2000년 11월 정신병에 걸려 무산군 강선구 육동골에 있는 신경병동에서 치료도 받았다. 20일 만에 제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도망쳐왔다.

죽을 각오를 하고 호주머니에 쥐약 한 통을 넣어가지고 다니다 2001년 4월 9일 다시 중국으로 도강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형님들, 누나 생각을 하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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