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부르며 이국서 함께 울었다”


전 평양도시계획설계사업소 토목기사였고, 97년 입국해 현재 탈북여성들의 모임인 진달래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인숙씨(60)가 지난 달 미국에 최초로 망명신청을 낸 탈북자 김순희씨(37)를 만나고 돌아온 감회를 말한다./편집자

지난달 15일부터 한 달간 미국에 머물다 돌아왔다. 탈북자 인권보호를 촉구하는 1000만인 서명서 상자를 유엔에 전달하는 데 탈북자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애초의 임무가 끝나고 또 다른 볼일로 필라델피아에 들렀다가 미국에 망명신청을 했다는 탈북자 김순희를 만나러 가게 돼 있었다. 들어보니 또 두 사람의 탈북자가 더 있다는 것이었다.

영어 한 마디 못하는 내가 힘겹게 LA까지 날아가서 만난 사람은 우선 한씨와 김씨라는 두 청년이었다. 나를 만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기에 "옳거니. 북한사람이로구나" 했는데 금새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며칠 후 중국국적의 조선족임을 실토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순희도 이미 망명신청서를 낸 상태이긴 했지만 인민학교를 '소학교'라고 불렀다거나 해서 북한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언론의 의혹을 사고 있었다. 나를 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변호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를 만나겠다고 한다길래 일행과 함께 샌디에이고까지 달려갔다.

그 아이가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여러 마디 물을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더러 '엄마'라고 부르는 그 아이는 나의 고향이기도 한 함경도내기가 틀림없었다. 함경도에서는 제 엄마건 옆집 엄마건 그저 엄마라고 부른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회포를 달래는데 좌중에 누군가가 노래부르기를 권했다.

우리는 북한노래는 뭐든 사상이 들어있으니 싫어서 '나의 살던 고향은' 을 부르자고 했다. 제목도 모르는 채 북한사람들도 많이들 부른다. 그 노래를 부르며 우리는 남은 사람들 생각을 했다. 순희는 아들을 두고 왔다며 하염없이 울었고, 나는 둘째아들과 손주를 끝내 두고 왔다며 같이 울었다. 우리는 그 멀고도 먼 미국땅에 와서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게 미국은 한평생 '증오의 땅'이어야 했다. 나는 북한체제에 너무도 충실했고, 건축기술자로서 내 직업에도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김일성 70회생일을 기념해 세운 170m 주체탑건립에 참여한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던가! 그런 내가 그 옛날의 적국 미국에 와서 또 하나의 망명자 '순희'를 만난 것이다.

그 아이를 두고 오면서 "잘 살아라. 우리도 통일될 것 생각해서 열심히 산다"고 했다. 그곳에는 여기처럼 같이 넘어온 동료도 없으니 몹시 쓸쓸할 것이다. 순희는 다음날로 미 이민국으로부터 망명심사를 받는다고 했다. 혼자 두고 오니 딸을 멀리 시집보낸 것처럼 짠하다. 우리는 한사코 '천국'이라는 그 고향땅을 왜 떠나야만 했던지.

그러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아직도 북한땅을 떠나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가진 우리의 동포들이 이국에서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다. 1000만의 정성이 하늘에 통해 제3국을 떠도는 탈북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정리=김미영기자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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