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진현/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국제정치학)

북한이 미국의 대화 재개 제의에 반응했다. 지난 6일 미국 부시 대통령의 대화재개를 선언한 지 12일 만이다.

북한이 18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밝힌 입장을 보면 대화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핵·미사일·재래식 군사위협 등 미국이 대화에서 다루기를 원하는 의제에는 강력히 반발하는 모습이다.

특히 재래식 군사력 문제는 “남조선에서 미군이 물러가기 전에는 논의의 대상조차 절대로 될 수 없는 문제”라고 못박았다. 대신 북측은 경수로 제공의 지연에 따르는 전력손실 보상문제를 우선 의제로 제기하였고, 미 국무부는 즉각 이를 근거없는 주장으로 반박하였다.

표면상 드러난 입장차이로만 보면 대화자체가 불가능해 보이지만 당장 회담이 파국을 맞을 가능성은 낮다. 가령 북측이 전력보상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이를 반드시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이 제시한 의제에 대한 “맞불전략”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 통해 협상에 임하는 자신의 입지를 제고하겠다는 의도인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북·미대화는 단기간에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양측이 당장 대화를 서둘러야 할 절박한 이유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의 대화재개 의사를 한국정부나 언론에서는 미국의 대북정책이 크게 변한 것처럼 해석했지만 사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우선 대화를 하되 핵·미사일 문제뿐 아니라 재래식 군사위협 문제도 다룰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또 ‘북한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제재완화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방침은 북한의 위협이나 억지 등 부정적 행동에 보상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현만 바꾼 것이다.

북한도 미국이 대화에 나서겠다고 한 만큼 일단 한숨은 돌렸을 것이다. ‘불량국가’에 대한 강력대응을 천명했던 부시행정부에 대해 내심 대단히 불안해하고 있던 북한은 미국이 대화로 방향을 정한 것을 안도하는 한편, 미국이 내건 대화원칙이나 의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결국 시간을 두고 미국의 입장을 약화 내지 완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할 것이다. 당장 미국이 원하는 의제를 중심으로 대화를 서둘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미대화는 상당기간 지루한 신경전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북·미대화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향후 남북대화는 어떻게 될까. 북한은 그동안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을 구실로 남북대화를 중단하였지만 실제 북한의 대화재개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우리로부터 경제지원을 얻어낼 수 있는가이다. 우리의 경제사정이 안 좋고 대북지원에 대한 국내적 합의 결여로 지원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에서 북한이 굳이 남북대화를 서두를 인센티브는 별로 없어 보인다.

또 북한의 입장에서는 남북대화를 중단하고 그 책임을 미국에 돌림으로써 미국의 대북정책에 압박을 가하는 효과를 노릴 수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북·미접촉의 재개에도 불구하고 남북대화도 마찬가지로 큰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임기 내에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을 바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대단히 답답할 것이다. 돌파구를 열기 위해 재래식 군사위협 문제는 남북한이 다룰 테니 미국은 손을 떼고, 손실전력은 한국이 보상하겠다는 방안에 매력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자칫하면 한·미 갈등이 불거지고 불필요한 경제적 부담을 덮어쓰며 국론분열이 일어나는 등 삼중고를 맞을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대통령의 임기가 1년 반 남은 시점에서 대북정책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초조함과 서두름이다. 초조하면 속을 보이게 되고 속을 보이면 상대에게 이용당하게 된다. 임기 내 무언가를 이룩하겠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때 대북정책도, 그리고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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