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남북 정상회담 소식은 다른 관련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된 학술 회의와 세미나가 모스크바에서 여러 차례 열렸다. 이런 자리에는 많은 한국 관계 전문가들이 참여, 기존 남북 관계를 회고하고 남북 관계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와 전망을 개진했다.

그런데 러시아의 한국 문제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사실은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한 내부뿐만 아니라, 동북 아시아 지역 전체에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 개최는 러시아 외교 엘리트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은 무엇보다도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햇볕 정책’의 산물이다. 지금까지 많은 러시아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은 ‘햇볕 정책’을 “훌륭한, 그러나 현실성이 없는” 정책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햇볕 정책’의 구체적 성과가 이번 남북 정상회담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현재 러시아는 이같은 한반도 평화 유지를 위한 김대중 대통령의 일관된 노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여러 차례에 걸쳐,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있어서 러시아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 점에 크게 주목하고 있으며, 이 발언이 ‘공허한 외교적 수사(수사)’가 아니기를 믿고 싶어 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안전 보장 문제는 단순히 남북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러시아 극동 지역의 안보 문제, 더 나아가 러시아 전체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가지 상기시키고 싶은 점은 지난 90년대 한반도와 동북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국제적 움직임과 노력이 거세게 진행됐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도 이러한 움직임에 어느 정도 동참했으며, 이에 대해 러시아는 다소 유감스런 감정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러시아의 역할을 강조, 이에 대해 기대감을 갖게 된 것이다.

러시아는 한반도 평화 정착과 통일을 진정으로 원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왜냐하면 ‘강한 통일 한국’이 러시아의 국익과 일치되기 때문이다. 반면 ‘강한 통일 한국’은 중국, 일본, 나아가 미국의 국익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우리는 ‘강한 한국’이 동북 아시아에서 경제적으로 중국과 일본을 견제하는 균형추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러시아가 한반도 통일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러시아는 ‘통일 한국’이 “러시아에 우호적이고, 외국 영향으로부터 자주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솔직히 말해, 미군 부대가 보다 러시아 국경에 가까이 위치하게 되는 통일을 우리 러시아가 ‘무조건’ 지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은 남북 통일 문제가 단순히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닌, 국제 문제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모스크바는 진정으로 이번 남북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번 정상회담은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있어서 남북한 당사자의 자주적 역량을 고양시키는 것이 될 것이며, 이러한 남북한의 자주적 대외 역량 강화는 러시아의 동북 아시아 정책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북한 핵(핵) 및 미사일 문제와 이를 명분으로, 72년 탄도탄 요격 미사일(ABM) 협정을 파괴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 러시아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모든 노력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르랴”하는 한국 속담처럼, 이번 정상회담 한번으로 50여년간 쌓여온 남북간의 모든 해묵은 문제가 해결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외세를 배제하고 남북한 최고 지도자가 한 자리에 앉게 됐다는 점이다. 양측의 입장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며, 또 겉으로 웃는 모습과 달리 깊은 상호 불신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한국 속담처럼, 이번 정상회담이 양측의 신뢰 회복과 다각적 접촉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리라 믿으며, 또 이를 염원하는 것이 러시아의 입장이다.

/정리=황성준기자 sjhwang@chosun.com

◈ 알렉산드르 보론초프

1958년 모스크바 출생

1981년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대 졸

1985년 러시아 동방학 연구소 박사

1984-현재 러시아 동방학 연구소 상임 연구원(한반도 국제 관계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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