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정상회담을 수락한 것은 ‘지원후 대화’라는 방침을 세운 김대중 정권과 대화하는 것이 득이라는 김정일 총비서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6월까지 비료 지원을 받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북한은 또 컴퓨터 기반과 인터넷망 육성을 위한 한국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다. 이런 것은 남북 정부간 대화가 아니면 힘들다.

북한은 또 남북 대화를 미·북 협의와 병행시켜 한·미를 대북 지원에서 경쟁시키자는 노림수가 있을 것으로 본다. 북한이 짧은 교섭만으로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것은 김 총비서가 권력을 장악해 내부 대립을 잠재웠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남북 정상회담은 어쨌든 개최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 다만 ‘조국 통일 3원칙을 확인하며…’ 운운한 대목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될지는 신경 쓰인다. 양측이 비정치적인 항목부터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신뢰 구축을 위해선 91년 남북 불가침 선언을 확인하고 화해·불가침·교류 협력 원칙과 상호 체제 존중을 재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한반도의 최대 문제가 군사력 대치인 만큼 군사부문의 신뢰관계 구축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한 논의가 있어선 안된다. 회담에서 주한미군 문제를 다루는 것은 터부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역안정 유지를 위해 미군 주둔이 불가결하다는 게 한·미·일의 공통 인식이다. 김 총비서도 이를 알고 있을 것인 만큼 미군 문제로 한국의 지원이 끊어지게 하진 않을 것으로 본다.

정상회담의 또 하나의 초점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배치·기술이전의 문제다. 미사일 기술을 중동에 이전해 외화를 획득하는 북한이 간단히 논의에 응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주한미군·미사일·경제지원 문제 등을 놓고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미사일 문제는 김대중 정권의 딜레마이다. 한국 보수파는 미사일 문제에서 한국이 침묵하길 바라지 않는다. 또 일본과 미국은 한국이 어느 정도까지 미사일 문제를 북한에 제기할지를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미사일 문제를 협의하길 원하지 않는다. 회담 결렬을 피하기 위해선 한국이 미사일 문제에 깊이 손댈 수 없다. 그러니 딜레마다.

미사일 문제에서 너무 구체적인 논의를 기대하는 것은 한국의 교섭전술 측면에서 손해다. 무엇보다 양 정상의 첫 만남 아닌가. 우선은 교류·협력·불가침·체제 존중을 재확인하고, 2차 정상회담을 서울에서 열기로 한 약속만 이뤄진다면 회담은 성공이다.

김 총비서로선 서울에 오는 것이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경제 지원을 받기 위해 서울에서의 회담 개최가 필요하다고 할 경우 이번엔 북한에 딜레마가 생긴다. 김 총비서가 “다음엔 서울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하는 시나리오가 과연 가능할까. 서울에서 후속 회담이 열릴 경우 구체적인 군사문제의 논의도 가능할지 모른다.

최근 북한에선 단순한 교섭이나 한국을 속이려는 테크닉 차원을 넘어선 ‘변화’가 나오고 있다. 물론 주한미군 철수와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망’, ‘남한 괴뢰정권’ 같은 기존 용어나 정책의 원칙적 부분엔 변화가 없다. 다만 주한미군 철수와 보안법 폐지 등을 남북대화의 ‘입구’ 내지 전제로 삼아왔던 것이 지금은 병행 논의해 최후에 해결하자는 ‘출구론’으로 전환한 것처럼 보인다. 북한의 원칙은 변하지 않았지만 교섭전술이 교묘해져 외부 지원을 확보하려는 스타일로 변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현실로 된 것이다. 김 총비서가 이룬 신기원은 경제 재건을 위해 ‘강성 대국 건설’의 슬로건 아래 내부 결속과 지도력 강화를 모색해 남북교류의 돌파구를 만드는 데 있다.

이는 유신헌법 하에서 대통령 권한을 강화해 내부 결속을 다지며 경제성장과 남북대화에 나섰던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그것과 공통부분이 있다. 김정일 총비서가 새마을운동을 평가했다는 것은 단순히 즉흥적인 착상이 아니다. 다만 사상 강화를 하고 있는 것, 무역 입국을 위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점이 결정적으로 박정희 시대와 다르지만 말이다.

만일 김 총비서가 ‘제2의 박정희’가 되려하고 있다면 북한은 앞으로 무역·산업 육성과 탈 이데올로기의 경향을 보일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정상회담의 배후에 북한의 ‘주체류(류) 대전략’이 깔려있다고 한다면 한국 측도 군사문제에서의 구체적인 성과를 너무 서둘러 중·장기적 신뢰 구축의 길을 파괴할 필요는 없다.

/정리=박정훈기자 jh-park@chosun.com

◈ 다케사다 히데시

▲1949년 출생

▲75년 방위청 방위연구소 연구원

▲한국 국제관계연구소·미국 스탠퍼드대·조지워싱턴대 객원연구원

▲현재 일본 방위연구소 연구실장

저서 ‘방위청 교관의 북조선 심층 분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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