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계기로 한반도 주변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한반도에 사활적 또는 전략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정상들이 천리길을 날아와 서로 머리를 맞대는 일이 잦아졌다. 55년간 대립해오던 남북 지도자의 첫 만남이라는 역사적 이벤트가 초래할 급격한 정세 변화와 그 이후의 주도권 싸움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긴박한 움직임들이다. 남북의 두 정상들도 정면 승부에 앞서 4대국과 개별 접촉하며 동북아 세력 지도를 ‘주도적으로’ 재구성 하기 위한 합종연횡의 전략 게임을 벌이고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지난 달 29일부터 31일까지 중국을 극비리에 방문, 장쩌민(강택민) 중국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와 만났다. 같은 날 모리 요시로(삼희랑) 일본 총리는 총선을 코 앞에 두고 있는 바쁜 일정을 쪼개 서울로 날아와 김대중(김대중) 대통령과 회담했다. 지난 4일에는 모스크바에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가졌다. 미·러 정상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실험발사 이후 재추진되고 있는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망(NMD)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8일 오부치 전(전) 일본 총리 장례식에 참석한 한·미 대통령이 금쪽같은 시간을 할애해 회담했고, 김대중 대통령과 모리 일본 총리도 열흘 만에 다시 만나 한·미·일 3국 우의와 공조를 과시했다. 바로 이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장쩌민 중국 주석에게 전화를 걸어 미·러 정상회담 결과를 브리핑했다. 푸틴은 미국의 NMD에 반대하는 중국과의 전략적 협조관계를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남북 정상회담이 끝난 후에는 중국·러시아, 러시아·북한 간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다음 달 말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리는 G8(선진8개국) 정상회담을 전후해 중국과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다. 북한 방문은 러시아 지도자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한반도 문제를 추가 의제로 포함시킨 G8 회담에서는 미·일 지도자가 별도 회동해 남북회담 결과를 놓고 의견을 나눌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문제를 주 의제로 다룬 최근의 빈번한 정상 접촉은 지금의 한반도 정세가 극도로 유동적임을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올지, 또 다른 대결을 낳을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남북 정상의 합의내용에 따라 남북 관계는 물론 주변국과의 관계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최근 동북아 정세와 관련한 주목할 흐름이 드러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북한이 과거의 동맹국들인 중국 러시아와 다시 접근하고 있는 반면, 한국 미국 일본 사이에는 미묘한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일의 방중은 중·북 우호관계의 복원을 상징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지난 수년간 추진해온 미국 중시 전략을 포기했다는 해석을 낳기도 했다. 또 연초 러·북 우호조약 체결에 이은 푸틴의 북한 방문은 스탈린 시대의 소련·북한 관계를 연상시키고 있다. 한·미·일 간 균열은 미국과 일본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에 대한 한국의 소극적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이 많다. 아시아위크지(지)는 중국은 남북에 영향력을 미쳐, 궁극적으로 주한 미군 철수를 노리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미국은 그동안 정상회담 의제에 핵·미사일 문제가 포함돼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해왔고, 일본은 일·북간 현안 해결이 선행되지 않는 한 대북 경협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모두 한국정부의 행동반경을 제한하려는 의도가 아닐 수 없다.

/김연극기자 yk-kim@chosun.com

남북정상회담과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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