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월북자 유태준 평양에서 기자회견](6.12. 12:30 평방)

남조선 정보원의 모략과 얼림수에 속아 남조선에 끌려나갔다가 공화국의 품에 돌아온 전 햠경남도 석탄관리국 함흥석탄판매소 지도원 유태준이 기자들과 회견했습니다. 여기에는 평양시내 신문, 통신, 방송기자들이 참가했습니다.

지금부터 남조선 정보원의 모략과 얼림수에 속아 남조선으로 끌려나갔다가 얼마 전에 공화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전 함경남도 석탄관리국 함흥석탄판매소 지도원 유태준 청년과의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유태준 청년이 발언하겠습니다.

▶ 유태준: 안녕하십니까? 제가 바로 남조선 괴뢰 정보원 놈들과 그놈들과 결탁한 외삼촌 안O0 놈 그리고 어머니 안O0 그리고 씨다른 동생 이O0 놈들의 모략에 걸려 남조선에 끌려갔던 유태준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저의 아내 최정남입니다.

오늘 이렇게 기자 여러분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보니까 정말 어지럽고 치욕스러운 저의 지난 날 과거로 하여 정말 머리를 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민들이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속에서도 붉은기를 높이들고 불사신처럼 일어서서 조국앞에 가로놓인 준엄한 난국을 헤쳐가고 있던 그 고난의 행군의 나날에 원수놈들의 간계에 걸려 남조선에 끌려갔으니 저야말로 조국을 반역한 놈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당과 은혜로운 조국에서는 죽어 마땅한 이 못난 놈을 관대하게 용서해 주시고 새 생활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고마움을 이 사랑과 은덕을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저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주신 고마우신 우리 당과 어머니 조국을 위하여 저의 생명의 마지막 한순간까지 모든 것을 다 바쳐 열심히 일하겠다는 것을 굳게 결의 다집니다. 이상 저의 심정을 먼저 간단히 말씀 올렸습니다.

▶ 최정남: 방금 저의 남편도 이야기하였지만 우리 당과 조국에서는 나라 앞에 엄중한 죄를 지은 저의 남편을 관대히 용서해 주고 새 삶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사실 저를 비롯한 저의 가족 친척들은 조국을 반역하고 딴 기로 가는 이런 사람과는 같이 할 수 없다고 여기고 영원히 결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당과 조국에서는 가족 친척들까지도 용서할 수 없다고 배척한 저의 남편을 다시 따뜻한 품에 안아 지난날과 다름없이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였습니다.

진정 우리 당의 품, 믿고 따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지난 날 어지러운 과거도 불문에 붙이고 다시 품에 안아 차별 없이 내세워 주고 참다운 삶을 안겨주는 자애로운 품,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위대한 삶의 품입니다.

저도 저의 가정의 재생의 기쁨을 가져다 준 고마운 우리 당의 크나큰 은정과 배려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내 나라 내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 저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나가겠다는 것을 굳게 결의합니다.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입니다. 유태준 청년이 어떻게 되어 남조선에 끌려나가게 되었는지 그 경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주었으면 합니다.

▶ 유태준: 그 이야기를 하자니 정말 제 자신이 막 저주롭고 또 어려운 시련을 이겨내면서 용감히 싸운 우리 조국 인민들 앞에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사실 저의 조국반역의 길은 씨 다른 동생 이O0 놈의 얼림수에 넘어간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98년 11월 당시 저는 함흥에서 함경남도 석탄판매소 지도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집에 집을 나가 방랑생활을 하던 이O0 놈이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머니 안O0 년과 씨 다른 이O영 놈은 이미 1998년 초부터 집을 나가 방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놈들이 방랑생활을 하게 된 것은 단순히 생활이 곤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전부터 안O0 년과 그의 영향을 받은 이O영 놈은 일하기는 싫어하고 공짜를 좋아하면서 쓰리와 절도 그리고 도적질, 사기협잡 그리고 부화방탕한 짓, 별의별 몹쓸 짓을 다하고 사회적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놈들은 만삭이 돼서 친정으로 해산하러 가는 산모의 물건을 털고 시퍼런 대낮에 남의 집돼지를 훔쳐서 각을 떠서 팔아먹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 놈들입니다.

또 이렇게 도둑질 한 물건을 팔아서 얻은 돈으로 집에 들어오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실컷 돌아먹으면서 방랑생활을 하곤 하였습니다.

1998년 초에 이 놈들이 집을 나가게 된 것도 이런 불건전한 생활의 연장이었습니다.
비록 어머니나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가정을 복잡하게 만들고 사회적 불안만 조성하며 다녔기 때문에 집에 있는 것보다 차라리 없는 게 시원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저와 저의 아내는 집을 나것 들어오지 않던 이O0 놈의 출현이 심히 불쾌했습니다.
이00 놈은 그동안 어디에 가 있었는가고 묻는 저에게 중국 동북에 있는 외켠 친척의 집에 가 있었다고 하면서 에미도 거기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집에서는 먹을 것도 충분하지 못하지 않은가, 외아들 윤호도 배불리 먹이지 못하지 않는가.

중국에 있는 친척들은 잘 사는데 그 친척들 집에 얼마간 가 있으면서 생활할 밑천도 마련해 가지고 오자는 것이었습니다.

혁명적 신념이 부족했고 또 나약했고 또 일시적인 생활난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던 저는 아들 윤호도 배불리 먹일 수 있고 또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갈 밑천도 마련해 가지고 오자는 이O영 놈의 말에 동요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 놈의 말을 따라나서기로 결심하게 되었댔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아들 윤호를 데리고 평양에 갖다 오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이 길에 조국 앞에 너무나도 엄중한 죄를 짓는 반역의 길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그때까지 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98년 11월22일 저는 이O0놈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와서 외삼촌 안O0 놈과 에미 안O0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외삼촌 안O0 놈은 저에게 자기가 회사 경리를 하는 합작회사가 하나있는데 거기 가서 두달간만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 이O0 놈과 나를 그 회사 쪽으로 가는 배라는데 데리고 가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배멀미나는 긴 항해 끝에 제가 도착한 곳은 회사가 있는 곳은 커녕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남조선 부산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저는 사복입은 두 놈에게 끌려서 승용차에 실려 부산비행장에 갔고 거기서 성루에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괴뢰 정보원 놈들과 또 기무사 놈들의 위장기관인 대성공사라는 데서 조사와 세뇌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후에 내가 이00 놈의 말을 통해서 자세하게 알게 된 바이지만 안O0 놈은 반공모략 책동에 써먹을 우리 사람을 넘겨주기로 하고는 돈을 받아쳐 먹고 이O0 놈을 나에게 보내서 중국으로 유인하여 데리고 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회사 경리를 하는 쪽으로 가는 배라고 나를 속여가지고는 부산으로 가는 배에 나를 태워서 괴뢰 정보원 놈들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이렇게 돼서 저는 결국 남조선 괴뢰 정보원 놈들과 그 놈들과 결탁된 안O교 놈, 그리고 에미 안O0 년, 씨 다른 동생 이O0 놈들에 의하여 남조선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상입니다.

통일신보사 기자입니다. 남조선 정보원과 기무사의 위장기관인 대성공사에서 검토와 세뇌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주셨으면 합니다.

▶ 유태준: 네. 남조선 괴뢰 정보원 놈들과 기무사 놈들의 위장기관인 대성공사는 서울시 00구 00동에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또 이 건물의 매 방마다에는 2대씩 감시 카메라가 달려 있어 가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일거일동을 항상 감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기 도착한 첫날부터 놈들의 집중적인 조사 세뇌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놈들은 나에게 이름, 직장 직위, 그리고 살던 집과 일하던 공장의 위치와 약도 그리고 굶어죽은 사람들의 숫자와 그들의 이름들에 대해서 집요하게 따져 물었습니다.

특히 놈들은 우리 공화국의 핵관련 기지와 비행장, 군부대들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가, 또 그에 대해서 들은 소문이라도 없는가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10여일 동안 이렇게 놈들이 집중적인 조사를 내는데 나중에는 거짓말탐지기라는 것까지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놈들은 내가 답변을 하지 못하면 일으켜 세워가지고 구둣발로 여기가 어딘 줄 알아 하면서 구둣발로 차면서 위협공갈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조사를 끝낸 다음에는 반공모략 책동에 써먹기 위한 세뇌교육을 악랄하게 들이대었습니다. 이렇게 세뇌교육 방법중의 하나가 변절자 놈들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놈들은 나에게도 변절자 놈들을 들이밀었습니다. 이 변절자 놈들에 대해서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 놈들은 몽땅 우리 공화국에는 엄중한 죄를 짓고 달아난 더러운 범죄자 놈들이었습니다.

제가 대성공사에서 만났던 송O0, 윤O0 놈들의 실례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회령 식료공장에서 있다가 도주한 윤O호 놈들은 도적질, 강도질, 사기협잡, 부화방탕한 못된 짓을 다하다가 사회적 범죄를 저지르다가 인민들의 심판이 두려워서 ...적들의 품으로 도주한 놈이고 그리고 송O0 놈은 망나니패 두목으로 피싸움을 일삼다가 사람까지 죽이고 교화를 받던 중에 도주한 살인자 놈입니다.

이 더럽고 추악한 변절자놈들은 저에게 뻗치지 말고 괴뢰 정보원 놈들이 시키는 대로 반공강연에 출연하게 되면 출연료도 많이 받고 또 기념품도 받게 된다고 저를 회유하여 나섰습니다.

제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송O0 놈은 그때마다 그 사람을 죽이던 솜씨로 마구 때리기까지 하였는데 그때마다 괴뢰 정보원 놈들은 뻔히 보면서도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곤 하였습니다.

저를 담당했던 양O0이란 놈은 어느 날 남조선 신문 00일보에 실린 글을 보여주면서 중국 동북에서 북한 당국에 의해서 숱한 사람들이 잡혀서 처형당했는데 우리가 알아본 데 의하면 거기에 당신의 아들도 있더라 그러니 북으로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남한에 정착하여 살면서 아들을 무참하게 죽인 자들을 반대하여 반공강연에 나서라고 하면서 얼마못 가 드러날 새빨간 거짓말로 저에게 대결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대성공사 사장 석O0 놈은 반공강연에 가면서 본인에게도 이모저모 유리하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나 저를 반공선전에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변절자 윤O0 놈의 말에 의하면 이놈은 대령의 군사칭호를 가지고 있는데 변절자 놈들을 끌고 전연으로 반공강연을 나갈 때면 항상 군복을 입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괴뢰 정보원 놈들은 전쟁기념관을 비롯해서 반공대결 외식을 고취하는 장소들에 끌고 다니면서 세뇌교육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이 괴뢰 정보원 놈들이 저를 남조선으로 유인 납치해 끌고 간 것은 우리 공화국의 무슨 있지도 않은 피난민인 듯이 사실을 왜곡해서 우리 공화국의 높아가는 대외적 귄위를 떨어뜨리고 남조선 인민들 속에서 날로 높아지고 있는 연북 통일기운을 억누르고 그들 속에 반공화국 대결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데 그 더러운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조선중앙방송위원회 기자입니다. 얼마 전 유태준 청년이 공화국의 품에 안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공화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동기에 대해서 그리고 그 경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 유태준: 제가 공화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남조선 사회는 썩을 대로 썩은 사회이고 또 병들대로 병든 사회이고 그리고 공화국의 품을 떠나서는 한시도 제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고 또 종당에는 개죽음밖에 당할 게 없다는 것을 통절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남조선 사회는 한마디로 말해서 앞날을 풀어갈 수 없는 사회입니다. 이 몇몇 안 되는 특권계층에게는 천당일지 몰라도 절대다수 근로하는 인민대중에게는 지옥과 같은 세상입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저는 5개월 동안 괴뢰 정보원 놈들의 대성공사에서 놈들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경상북도 대구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괴뢰 정보원 놈들은 내가 반공강연에 출연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그 때문에 대구에 내려가게 됐다고 노골적으로 지껄이는 것이었습니다.

대구에서는 저는 이 담당형사 놈의 항시적인 감시와 통제를 받으면서 초보적인 인간의 자유와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정말 피눈물 나는 고역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건설장에서 땅파는 일, 식당, 시장일 그리고 신문배달, 우유배달, 지어는 목욕탕에서 남의 때를 밀어주는 일까지 별의 별 갖은 고역을 다 치루면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다 받으면서 뼈빠지게 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뼈를 깎으면서 아글타글 일했지만 정작 손에 걷어지는 것은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하루 일이 끝내고 나면 온 몸이 땅속으로 젖어드는 것 같았고 정말 밥숟가락 쥘 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누워서 정말 온 밤 뜬눈으로 새우면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할 때마다 우리 공화국에서 무상치료 무료교육을 비롯한 인민적 혜택속에서 사람답게 정말 인간의 존엄과 긍지를 마음껏 누리면서 삶을 빛내이던 그 공화국에서의 유복했던 나날이 자꾸자꾸 떠올라서 정말 눈물짓곤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뼈빠지게 돈벌겠다고 아글타글 일해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에게 무슨 희망과 미래가 있는가. 있다면 오직 한평생 내가 이 무권리 속에서 정말 돈을 벌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어느 골목에서 임자 없는 개처럼 조용히 죽어버리는 것이 나에게 차려진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갈마들어 정말 절망속에서 몸부림치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저에게는 이 괴뢰 정보원놈들과, 담당형사놈들의 감시와 통제를 받으면서 먹고 살기 위해서 발버둥질하다가 죽어야 하는 그런..밖에 차려질게 없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불행은 오직 저에게만 차례진 것이 아닙니다.

남조선의 절대다수 근로하는 인민대중이 이렇게 암담한 미래가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지하철도, 지하도, 역구내 등 남조선 거리 골목골목 이르는 곳마다 숱한 실업 실직자들이 직업을 잃고 한지에 나앉아가지고 거지가 돼서 사람들의 발길에 채우면서 하루하루를 사람들의 동정에 호소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끔직한 실업자 대열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습니다. 대우를 비롯한 대기업들이 연이어 파산되고 그와 연결된 중소기업체들이 무리로 도산하고 있는데 따라서 실업자 대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고 또 암담한 생활고에 정말 절망한 사람들이 계속 자살의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살의 길을 택하면 자식들이 부모의 뒤를 따라서 죽음의 길을 택합니다.

21세기는 정보산업의 시대라고 하지만 남조선에서는 이 정보산업이 사람들에게 자살의 길을 안내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남조선의 인터네트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살싸이트라는 것이 설정되어 있는데 숱한 사람들과 청소년들이 거기에 접속해 가지고 자살을 쉽게 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고 또 그걸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이 직업을 가진 사람도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언제 자기가 다니는 회사가 망하고 언제 실업자가 돼서 거리에 거지가 돼서 쫓겨날지 불안한 마음을 한시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불안한 마음을 술로 달래다 못해서 마약을 쓰고 있는 마약중독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대구에 갔을 때 거리 골목골목 그리고 쓰레기통마다 지저분하게 널려져 있는 조그만 1회용 주사기들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단순히 치료를 하고 버린 의료용 도구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담당했던 이O0라는 담당인사 놈이 하는 말이 그것이 다 마약을 복용하고 버린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최근에는 이 마약을 핏줄에 주사하는 방법이 아니고 코로 흡입하는 방법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공화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비정상적인 일이 남조선에서는 버젓이 보편적인 현상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남조선 사회는 인간의 정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메마르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세상입니다. 제가 남조선 대구에서 체인기업이라고 하는 물품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그런 회사에서 일할 때입니다. 그때 저는 상자포장하는 일을 했는데 그걸 하자면 뺀딩기라고 하는 상자포장하는 기계를 다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처음 기계를 다루어 보는 데다가 까딱 잘못하면 손목 짤리운다고 해서 그래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옆에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한테 물어봐도 몽땅 다 한다는 소리가 혼자서 알아서 해요 하는 소리뿐이었습니다. 자기들도 자체로 배워서 했으니까 너도 뭐 사고 나든 말든 네 혼자 알아서 하라는 소리였습니다.

몸은 비록 사람들 속에 있다고는 하지만 마음은 항상 바다의 외진 섬에 고독하게 갇혀있는 그런 심정이었던 것이 그때 저의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외로움과 고독감에 허덕일수록 우리 공화국에서 정말 동지적인 사랑과 의리가 사회관계의 기본으로 되어 있는 우리 공화국에서 정말 행복하게 살던 그때가 자꾸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정말 제가 공화국에서 결혼식을 할 때 일입니다. 그때 저의 집은 함흥에 있었고 저의 기업소는 함흥에서 멀리 떨어진 고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저의 당비서 동지가 기업소의 하나밖에 없는 총각이 장가가는데 자기가 직접 가서 축하해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국수를 비롯한 숱한 결혼식 물자들을 싣고 저의 집으로 향해서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차가 얼마 못 가서 고장이 났다고 합니다. 이런 정황속에서 당비서 동지가 되돌아갔다고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의 당비서 동지는 그 무거운 결혼식 물자들이 든 배낭을 지고 밤새도록 걸어서 저의 집에 찾아와서는 진심으로 결혼을 축하해 주시고는 그 길로 기업소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렇게 따뜻한 인정미가 철철 흘러 넘치는 우리 공화국 사회와 남이야 죽건 말건 그저 자기 혼자 이익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그런 외식외풍이 판을 치는 사회입니다. 고기떡을 보고도 오뎅이라고 하고 그 다음에 문 여는 것은 몽땅 오픈이라고 하고 또 손님접대를 써빙 그리고 야한 감탄사까지 오 마이 갓이라고 합니다. 이 외래어를 모르면 사람값에 가지 않고 바보취급을 받습니다. 거리의 간판, 상점, 식당의 간판 모두 외래어 투성이입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쓰고 있는 외래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거리낌없이 쓰고 있는 편입니다.

제가 이스카라라는 식당에 배달을 해주고 그 식당 간판 내용이 뭔지 주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도 하나도 모르는데 들어보니깐 듣기 좋은 말 같아서 내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고 정말 민족의 것이라고는 여지없이 말살된 사회입니다.

또 남조선 사회는 돈 있고 권세 있는 놈들은 더욱 떵떵거리며 살고 절대다수 불쌍한 근로인민 대중은 한평생 무권리와 치욕과 빈궁속에서 뼈빠지게 일하다 죽어야 하는 그런 암담한 사회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남조선 사회의 실상입니다.

정말 순결하고 깨끗하고 그리고 인간다운 정에 넘치는 우리 공화국에서 태어나서 성장하고 또 가정까지 이룬 저로서는 이런 숨막히고 썩을 대로 썩고 병들 대로 병든 사회에서 살래야 살수가 없고 또 참을래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사람의 정이 그리웠고 삶이 꽃펴날 수 있고 또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집이 그리웠었고 또 공화국의 품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 공화국의 품으로 되돌아가려고 굳게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나라 앞에 너무나도 엄청난 죄를 저질렀지만 ...앞에서 내 용서를 빌고 설사 내 죽는다 해도 내 고향 내 조국에 꼭 묻히고 싶었던 것이 저의 절절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조선 사회를 뛰쳐나오기 위해서 고심하고 고심하던 끝에 국제결혼이라는 구실을 대고 남조선 사회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공화국의 품에 안기게 됐습니다. 그리고 해당기관에 찾아가 자수하게 됐습니다. 이상입니다.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입니다. 유태준 청년이 남조선 정보원이 유인에 걸려 3국을 거쳐 남조선으로 끌려나갈 때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는 데 그 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 유태준: 저의 아들 윤호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터쳐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못난 아버지를 둔 것으로 해서 정말 아이가 그런 불행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나는 회사에서 취직시켜 주겠다던 외삼촌 놈의 말을 듣고 떠날 때 아들을 3국에 있는 어머니 안O0 년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남조선에 유인 납치..끌려간 후 안O0 년과 그 외척 친척놈들은 내가 아이를 데려가지 않으면 당장 팔아버리겠다고 위협해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뼈빠지게 번 숱한 돈을 들여가지고 아이를 남조선 대구로 데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국제결혼이라는 구실을 대고 남조선 사회를 빠져나올 때 아이를 데리고 나오려고 무진 애썼는데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남조선 것들을 내가 무슨 딴 목적을 가지고 있겠는가 하고 의심하면서 국제결혼을 하기 위해서 3국에 나가겠다는 저의 요구를 6개월 동안이나 묵살시켜 보려고 더군다나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말도 비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며칠동안 어디에 갔다 오겠다고 하고는 헤어졌습니다. 아마 지금 제 아들 윤호는 거지가 되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아마 이 돌아오지 않는 애비를 찾으면서 울고 있을지 모릅니다.

저는 이 기회에 남조선 당국에 강력히 요구합니다. 제 아들 윤호는 아버지,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야 할 아무러한 이유도 없는 아이입니다. 제 아들 윤호가 이렇게 부모와 떨어져서 그런 비참한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남조선 괴뢰 정보원 놈들 때문입니다.

우리 공화국의 공민을 유인 납치해서 반공모략 책동에 써먹으려던 괴뢰 정보원 놈들은 그런 모략행위가 없었던들 제 아들 윤호가 부모와 떨어져서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하는 비극이 일어나지부터 않았을 것입니다.

남조선 당국은 마땅히 제 아들 윤호를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공화국의 품으로 지체없이 그리고 빨리 돌려보내야 합니다. 우리 부모들은 이것을 요구할 당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남조선 당국이 지금 이산가족의 재회요 뭐요 하면서 듣기 좋은 소리를 많이 늘어놓는 것 같은데 자기들이 하는 수작이 만약 사실이라면 또 그것을 실현할 진정한 의사가 있다면 제 아들 윤호를 공화국의 품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 아무러한 조건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 최정남: 남조선 당국은 민족의 단합과 나라의 통일을 저해하고 우리 단란한 가정에 참을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악랄한 반공화국 모략책동을 당장 걷어치워야 합니다. 그리고 제 아들 윤호는 이 어머니가 있는 공화국의 품으로 당장 돌려보내야 합니다. 저는 지금 아이 때문에 미칠 정도입니다. 남조선 땅에 아이를 그냥 두고서는 한순간도 어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당장 돌려보내야 합니다.

민주조선사 기자입니다. 유태준 청년에게 한가지 더 질문하겠습니다. 이 기회에 남조선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연고 관계가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 유태준: 예. 저는 안00이나 이00 따위를 무슨 어머니나 동생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이 조국을 반역하고 제 자식을 치욕과 불행에 빠뜨렸으며, 또 모성애는 한 조각도 없는 그런 안O숙년을 어머니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은 지구상 수억만 어머니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안O0년과 이O0 놈은 조국을 반역하고 가정도 가족도 버린 더러운 인간쓰레기들이 갈 길은 오직 제 명도 다 못 살고 그리고 스스로 개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분별있게 처신하여야 합니다.

조국을 반역하고 남조선으로 도주하여 간 반역자 변절자들도 저들이 처한 가련한 신세를 똑똑히 알고 분별있게 처신하여야 합니다. 남조선 괴뢰정보원 놈들이 오늘은 이 조국반역자들에게 몇푼의 돈을 던져주면서 그들을 반공화국 모략책동에 내몰지만 앞으로는 헌신짝처럼 차 던지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불을 보듯 명백합니다.

이것은 지난날 남조선으로 도주하여 가서 괴뢰 정보원 놈들에게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하다가 비참한 꼴이 돼 버린 선임자 놈들의 말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국을 반역하고 남조선으로 도주하여 간 자들은 남조선 괴뢰 정보원놈들의 앞잡이가 돼서 그놈들이 시키는대로 반공모략책동에 나서는 길이 저들이 조국 앞에 저지른 엄중한 죄과 위에 또 큰 죄를 쌓고 스스로 무덤으로 가는 길을 앞당기는 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저의 경우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우리 공화국에서는 지난날 아무리 엄중한 죄를 저질렀다 하여도 제 발로 감옥에 찾아와서 자기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또 솔직히 자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다 과거를 불문에 붙여주고 재생의 길을 열어줍니다. 조국을 반역하고 남조선으로 도주하여 간 자들을 이제라도 민족을 위하고 통일을 위한 길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더 질문할 것이 없습니까? 없다면 유태준 부부가 기자 여러분들에게 더 얘기할 것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 유태준: 저는 앞으로 저에게 재생의 길을 열어주신 고마운 우리 당과 은혜로운 조국을 위하여 저의 이 생명의 마지막 한순간까지 모든 것을 다 바쳐 나가겠다는 것을 굳게 결의 다집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어서 저의 생명의 은인이시고 우리 가정의 은인이신 그리고 따뜻한 태양이신 자애로운 어버이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께 이 심장속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큰절을 삼가 올리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남조선 정보원의 모략과 얼림수에 속아 남조선에 끌려나갔다가 공화국의 품에 돌아온 전 함경남도 석탄관리국 함흥석탄판매소 지도원 유태준이 기자들과 회견한 소식을 보내드렸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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