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의 일이다. 필자와 절친한 한 미국인은 수십년간 한국과 한국문화를 흠모하고 한국사람을 좋아하는 친한파 인사였다. 그런데 그가 꿈에 그리던 한국에서 대학교수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도착했을 무렵은 반미시위가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양키 고 홈’을 외치며 격렬한 시가행진을 벌이는 시위대는 성조기를 짓밟고 다녔고, 미국 대통령과 주한 미국대사의 형상을 만들어 불태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단지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가 당한 모진 배척은 극심한 정신적 혼돈과 신변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했다. 결국 그는 오래 준비했던 한국생활을 눈물로 접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지 50여년이 흘렀다. 주한미군의 지위를 명시한 SOFA는 조만간 2차 개정논의가 재개될 예정이지만 한국정부와 미군 간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주한미군으로 인해 우리 국민들의 기본적 인권과 행복추구권이 저해된다면 철저하게 사실을 가리고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그러나 성급하게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먼저 한반도의 현실과 주한미군이 차지하고 있는 역할과 의미를 곱씹어 보아야할 것이다.

최근 북한과의 정상회담이 추진되는 등 화해 무드가 감돌고 있기는 하지만, 북한과 우리는 엄연한 정전(정전) 상태이다. 미·북간에도 미사일 회담 등이 계속되고 있지만, 북한 미사일은 남한과 일본, 미국을 겨냥하고 있다. 미군을 철수시킨다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힘의 공백은 누가 메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현 상태에서 미군이 철수한다면 한국군의 국방력만으로 전시국가체제를 유지하는 북한에 대항할 수 있을까. 또 미군의 철수에 따라 천문학적 액수로 급증할 국방비는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국방력의 강화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주한미군, 한반도의 안보, 동북아의 평화와 같은 제반 문제를 거시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감정 폭발로 한반도 평화정책 전체를 그르칠 수는 없다.

미국은 한반도의 전쟁 억제와 동북아시아에서의 세력균형 유지, 장기적으로 중국의 팽창 저지라는 나름의 계산을 가지고 주한미군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 이후 지속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북한도 대내 단합용 및 대외 협상용으로 주한미군을 활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일본도 주일미군의 주둔 근거가 되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상 주한미군은 물리적인 억제능력보다는 심리적인 면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 당시 발생했던 노근리사건과 최근의 매향리사건까지 한꺼번에 싸잡아서 주한미군 물러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국가 안보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주한미군과 관련된 사건을 거명하면서 미국에 대한 증오를 과격하게 표현한다면 미국 내의 한국에 대한 여론도 부정적으로 기울 수 있다.

만약 미국인들이 워싱턴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지고 태극기를 불태운다면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주한미군은 감정적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자칫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워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 현명하게 대응하자.

/ 김 정 원 세종대 국제교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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