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책시로 추방된지 1년이 지나면서 가지고 온 돈을 다 써버렸다. 가지고 있던 가구들도 다 팔고, 사기당하고 정말 사는 게 말이 아니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평양에 갔다 오자고 했다. 평양에 가려면 통행증(여행증명서)이 있어야 하지만 한시가 급했다. 역에 나가니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7시간 정도 기다려서야 평양행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원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악을 쓰며 역에 들어갔다. 기차는 이미 사람으로 꽉 차고 열차 지붕 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다.

이때 어머니가 나를 찾으며 “여기 올라타 앉으라”고 했다. 사람들이 열차에 오르는 발판(계단)이었다. 허리를 숙이면 엉덩이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그곳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손잡이를 꼭 잡고 앉았다. 엉덩이를 제외하고는 온몸이 허공에 뜬 모습이었다. 머리와 땅 사이의 거리는 50cm 정도.

드디어 열차가 떠났다. 숙인 머리 아래로 땅이 쑤욱~ 지나가고 굴을 지날 때는 엄청난 공포가 몰려왔다. 까딱 잘못하면 그냥 떨어져 죽는다. 이런 자세로 1~2시간 가니 몸에 쥐가 일어났다. 어머니는 “절대 손을 놓으면 안된다. 밑을 보지 말고 눈을 감고 있어라”고 하면서 나를 격려했다. 훗날 어머니는 그날을 돌이키며 "내가 못나서 딸자식을 죽이는구나"하고 속으로 엄청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열차는 계속 달렸다. 이때 위에서 어떤 남자가 소리쳤다.

"여기 계단에 여자 둘이 앉아있어요. 조금만 더 가면 떨어져 죽을 것 같은데 조금씩 자리를 조여줍시다!"

정말 눈물나게 고마운 목소리였다. 이렇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열차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 열차안은 말 그대로 콩나물시루였다. 두 발을 바닥에 둘 수가 없었다. 한 발로서서 힘들게 이틀에 걸쳐서야 평양 근처 신성천역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안전원들의 단속이 엄격하다. 여행증명서가 없는 우리는 이곳에 내려 몰래 빠져나가야 했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는데 신성천역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우리를 붙잡았다.

한참 수모를 당하다 무심결에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정신병자처럼 굴었다. 그러자 다음부턴 여행증명서 떼어가지고 다니라면서 보내주었다. 신성천부터 평양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먼저 성천군까지 100리 정도를 걸어갔다. 버스는 커녕 말달구지도 하나 없었다. 성천군에 도착해 아는 사람 집에 찾아 들어가 하루 밤을 보냈다. 아침에 주인 아저씨가 가는 길에 먹으라고 삶은 고구마 4알을 주었다. 여기서 평양까지는 200리 길이다.

강동 근처의 긴 터널을 통과해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를 단속했다. 노농적위대라고 했다. 대뜸 여행증명서를 보자고 하길래 주춤거리니까 따라오라고 하면서 몇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 사람들도 여행증명서가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강제노동에 가나, 아니면 감옥에 가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뒤쪽에 보니 도랑이 있었다. 어머니보고 화장실에 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갖고 있던 물건을 옆의 아주머니한테 맡기고 도랑쪽으로 다가갔다. 단속하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만 살피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손을 꼭 잡고 도랑에 뛰어 내려 길을 따라 정신없이 뛰었다. 그 과정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드디어 밤 9시쯤 대성산에 있는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할머니네 집 쪽으로 가는 차에 앉았다. 평양 시민들이 우리를 무슨 외계인 보듯이 보았다. 지방사람들은 한눈에 구분이 된다. 봉화역에 내려 할머니네 집에 찾아갔다. 초인종을 눌렀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시고는 연신 눈물을 흘렸다. 1년 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가면서 말을 잇지 못하셨다. 부엌에서 흰 쌀밥을 가득 담아오시며 할머니는 울고 또 우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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