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서 버스에 오른 지 두 시간 남짓.

한창 평탄작업을 하고 있는 개성공단과 함께 멀리 개성시를 안고 있는 송악산이 눈에 들어왔다.

남측과 북측 출입사무소를 통과하는데 시간을 보내지만 않았으면 서울에서 출발해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개성. 이 곳에 남측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기까지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곧바로 펼쳐진 개성 시가지로 이곳이 고향인 실향민들로 구성된 관광단을 태운 버스가 진입하자 여기저기서 어린 시절 기억을 되새기는 웅성임이 들려온다.

방북단 중 최고령자인 송한덕(97) 할아버지는 고향 집 주소까지 되뇌며 “이렇게 생전에 고향 땅을 다시 밟게 되다니 꿈만 같다”고 감격해했다.

대로에서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고향집이 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버스에서 내리는 것은 물론 차창 밖으로 사진 찍는 것도 금지돼 눈으로만 고향의 풍경을 담아야 했다.

시내를 부지런히 오가는 시민들은 대부분 무표정한 모습이었지만 일부는 손을 흔들며 관광단을 반겼다.

북측 안내원은 “방송에서 남측 관광단들이 온다고 알렸다”면서 “통일의 첫 걸음이라는 생각에 모두 남측 관광객을 반기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개성 시내를 가로지른 버스가 도착한 곳은 고려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는 성균관. 지금은 건물 일부가 고려시대 유물 1천여점이 소장된 고려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물관에는 베테랑 해설원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낭랑한 목소리로 유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리옥란 해설원은 “송도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벌써 15년째 박물관 해설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백년은 됐음직한 은행나무가 울창한 성균관을 기억하는 실향민들도 많았다.

김영휘(77) 할아버지는 “일제 말기인 소학교 3학년 때 성균관에서 열리는 제사에 구경온 적이 있었는데 너무 더워서 쓰러졌다.

은행나무 밑에서 쉬면서 친구들이 떠다 준 냉수를 마시고 정신을 차렸는데 그 때 은행나무가 그대로 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5살 아래 누이가 개성에 있는데 혹시나 버스 창밖으로라도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못만날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손을 꼭 잡고 성균관을 둘러보는 노부부도 있었다. 개성에서 만나 그곳에서 결혼식까지 올렸다는 이근엽(83) 할아버지와 최금순(82) 할머니.

최금순 할머니는 “중매로 만나 1944년에 개성 북부교회에서 결혼했으니 결혼 60여년만 개성을 다시 찾은 것”이라며 “만월대 갈대숲에서 데이트를 즐기곤 했는데 이번에는 가지 않는다니 아쉬울 따름”이라고 웃었다.

이근엽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개성시내가 대부분 한옥이었는데 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서는 등 많이 변했다. 그렇지만 그때보다 많이 삭막해진 것같다”고 소감을 털어놓았다.

버스로 5분쯤 타고 찾아간 곳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에게 살해당했다는 선죽교. 길이 6.67m, 폭 2.54m의 자그마한 돌다리로 생각보다 작았다.

처음에는 선지교라 불렸지만 주위에 충절을 의미하는 대나무가 자라면서 후에 이름이 선죽교로 바뀌었다. 북쪽에서는 이 곳을 국보로 관리하고 있다.

이 곳에도 실향민들의 추억이 묻어났다. 김영두(82) 할아버지는 “선죽교 바로 옆에 있는 제2보통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한 달에 두 번씩을 선죽교를 청소하러 나왔다”면서 “지금도 그때 못지 않게 깨끗하게 보존돼 있다”고 말했다.

윤정덕(71)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선죽교에서 친구, 선배와 함께 찍었다는 빛 바랜 사진을 꺼내들었다.

“1950년 3.1절을 기념해 사진을 찍었다”면서 “나중에 친구, 선배와 함께 와서 다시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그의 목소리는 다시 중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 들떠 있었다.

관광단은 선죽교 근처에 있는 숭양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몽주의 옛 집터에 지어졌다는 숭양서원도 국보로 지정돼서인지 세월의 무게에도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숭양서원 옆에 있는 개성시 문화회관에서는 우연인지 몰라도 때마침 ‘고향의 봄’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전 일정을 마친 관광객들은 자남산여관, 민속여관, 통일관, 영통식당 등 북측 식당 4곳으로 나뉘어 점심을 먹었다.

기자가 찾은 자남산여관 식당에는 개성 약밥과 각종 나물, 닭고기 볶음, 두부부침, 잡채, 콩나물국 등이 한상 가득 차려졌다.

관광객들의 입맛을 당긴 것은 찹쌀도너츠와 비슷한 맛인 ‘우뫼기’와 편육볶음 등 개성의 전통음식.

송한덕(97) 할아버지는 “옛날 맛이 그대로 나는 것 같다. 아주 맛있다”며 가득 담은 밥 한공기를 깨끗이 비웠다.

점심을 먹은 관광단은 개성에서 북쪽으로 24㎞ 정도 떨어져 있는 박연폭포로 향했다. 전형적인 시골 풍경을 헤치며 40여분을 버스로 가야했는데 이번 시범관광을 위해 일부 구간은 아스팔트로 포장을 했다고 한다.

천마산 자락에 내려 500m쯤 걷다보니 우레같은 물 소리가 들린다.

황진이, 서경덕과 더불어 송도삼절로 불리는 박연폭포다. 북측이 천연기념물로 관리하고 있다.

어제와 그제 내린 비로 물줄기가 어느 때보다 세차다고 북측 안내원이 전했다.

아침부터 따갑게 내리쬐던 햇살도 구름 뒤로 가려져 시원함이 더했다.

한 관광객은 흥에 겨워 창을 불렀고 일부 관광객들은 이에 맞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김복환(75) 할아버지는 “개성중학교 시절 개성에서 이 곳까지 40리 길을 걸어 소풍을 왔다”면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곳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폭포 옆으로 난 산길로 20분쯤 걸었을까. 관음사라는 이름의 한적한 절이 눈에 들어왔다.

남쪽 스님과는 다르게 머리를 기른 관음사 주지 청맥 스님은 “신도가 1천명 정도 된다. 대부분 개성에 사시는 분들”이라며 넉넉한 웃음으로 남측 관광객들을 반겼다.

관음사에서 내려오니 서울로 향하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개성 시내로 들어오더니 조금이라도 더 고향 땅을 눈에 담으려는 관광객들의 아쉬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달음에 남녘 땅으로 향했다.

설영철(83) 할아버지는 “고향 집을 못가본 것이 아쉽지만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못 밟을 줄 알았는데 이 정도가 어디냐”면서 “정말 즐거웠고 꼭 다시 와보고 싶다”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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