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설립 반대파 우산들고 강의실 쳐들어와
장리욱 학장이 ‘나를 쳐라’ 호통치자 물러갔지"


“1946년 9월 중순이었어. 입학 등록을 하려고 (서울) 동숭동을 찾았는데 글쎄 서울대 문리대 정문 앞에 수십 명이 늘어서 ‘등록하면 매국노’라며 시위를 하고 있지 뭐야.

그때 어딘가에서 5~6명의 젊은이들이 ‘등록을 막는 자가 신탁 통치 찬성파냐? 누구냐’고 소리치며 나타나더라고. 학교 입구에 있던 등록 거부파들이 움찔하더군. 한동안 긴장감이 고조됐지.”

설립된 지 한 달도 채 안 된 국립서울대는 등록 초기부터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학생들을 맞았다. 이른바 ‘국대안(국립서울대설립안) 파동’. 국내 최초의 국립종합대학을 설립하는 방안에 대해 일부 교수,학생들이 국대안에 반대하고 다른 세력들은 국대안을 찬성하며 대립했다.

창립 첫해인 1946년 가을 국립서울대에 입학한 뒤 사범대(교육학)를 나와 문교부장관과 국무총리 등을 지낸 정원식(鄭元植)씨는 ‘국대안 반대’에 반대하며 험난한 서울대 설립 과정을 지켜봤다. 그로부터 서울대 사범대 후배인 목정민(睦楨民·생물교육 4)씨와 함께 시련의 서울대 창립 역사를 들어봤다.

1년 넘게 贊反갈등… 정상수업 꿈도 못꿨어

반대운동, 미군정 반대로 흘러 세력 잃었지

교재없어 ‘필기강의’… 독서모임으로 보충



◇1949년 12월 서울대 독서회 멤버들이 겨울방학 중 세미나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 당시엔 부족한 수업보충을 위해 동아리 형식의 독서모임이 많았다고 정원식 전 국무총리는 회고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원식 전 총리, 앞줄 오른쪽 끝은 이영덕 전 총리.

―설립 초기 서울대 분위기는 어땠나요?

“어수선했어. 정상적인 수업은 꿈도 꾸지 못했고, 교수·학생 할 것 없이 국대안에 반대하는 데모가 연일 벌어졌지. 반대로 ‘공부하자’며 강의실로 향하는 교수나 학생들은 이들과 맞서는 형국이었고. 1년여 동안 그랬어. 1948년에 들어서야 안정된 것 같아.”

―국립서울대설립안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해방 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군은 조선총독부 학무국(교육부) 접수 책임을 맡은 라커드(E.L. Lockard) 대위를 교육 책임자로 임명했지. 시카고의 한 대학 영어 선생이었던 라커드 대위는 한국인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마침 교육철학을 전공한 컬럼비아대 출신 오천석 박사를 만난 거야.

오 박사는 미군정 학무국에서 유억겸(유길준 아들) 박사와 함께 국립대학 창설 계획을 구상했고,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했어. 서울대가 탄생한 순간이었지.”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손녀뻘인 서울대 사범대 후배 목정민(생물교육 4)씨에게 광복 후 서울대가 창립되던 당시 국대안(국립서울대안) 파동과 의미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채승우기자rainman@chosun.com



―왜 국대안을 만들었나요?

“오천석 박사 등은 한국을 대표하는 버젓한 국립대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어. 그리고 당시 최고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과 전공별로 흩어진 3년제 전문학교를 통폐합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본 거야.

예컨대 법학 전문인을 키우는 기관으로 경성대학에 법문학부가 있고, 별도의 경성법학전문학교가 있었는데 재원이 중복되게 지출돼 낭비요인이 컸다고 본 게지.”

미군정 시절 문교부 초대 차장(차관)이었던 오 박사는 시범적으로 1946년 4월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대학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양대학의 반대에 부닥치자 부분 개편을 포기하고 전면적인 통합에 나선다.

전면 개편 책임을 맡은 오 차장은 그해 7월 경성대학과 관·공립 전문학교를 통합해 9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을 설립하는 ‘국립서울대설립안’(약칭 ‘국대안’)을 발표한다.

―국대안은 누가 왜 반대했나요?

“대부분 좌익 성향 교수와 학생들이었어. 이들은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을 모체로 한 점을 문제삼았고, 미국이 식민지 교육을 하려 한다고 주장했지. 또 전문학교를 줄여놓아 한국인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축소하려 한다며 반대했지.

지금 생각하면 서울대 초대 총장을 미국인(엔스테드 대위, 법학박사 출신)으로 내세운 점은 잘못한 것 같아.

한국의 대표 대학을 만들어놓고 미군 대위를 앉힌 건 한국 지식인의 거부 반응을 주기에 충분했거든. 하지만 당시 최고 학생들은 경성대학과 전문학교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주축으로 국립대학을 세울 수밖에 없었고, 없는 재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통폐합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국대안을 둘러싼 갈등이 그토록 심각했나요?

“상과대학하고 사범대학에 반대파 강성이 많았어. 나는 국대안 찬성파 입장에 서 있었는데 1947년 초 새 학기 등록을 앞두고 학우회(찬성파)와 학생회(반대파) 간에 신사협정이 맺어졌지.

남의 선전물은 훼손하지 말고 자기 주장만 펼치자는 거였어. 그 바람에 내가 다니던 을지로 5가의 사범대 건물은 온통 하얀색 삐라(전단)로 도배질됐었어. 찬성파는 ‘등록하자’, ‘공부하자’ 등이었고 반대파는 ‘국대안 결사 반대’ 등등을 내걸었어.”

―직접 충돌은 없었나요?

“왜 없었겠어. 1947년 6월쯤이었을 게야. 기말고사를 치르고 있었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만 이내 우산을 든 30~40명의 학생들이 강의실에 쳐들어 왔어.

그때 비가 내렸는데 국대안 반대파들이 우산을 들고 와 “너희들만 시험볼 수 있느냐”며 고함쳤지. 일대 ‘우산 격투’가 벌어졌어. 시험 감독하던 교수는 어쩔 줄 모르다가 슬그머니 나가버렸어.

그때 사범대학장이었던 장리욱 교수가 달려들어 왔지. 그러곤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이놈들 치려면 날 쳐라”며 우산 격투장으로 뛰어들었고, 이내 싸움은 끝났어. 그때 장 교수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도산 안창호의 수제자인 장리욱 교수는 나중에 서울대 3대 총장(48년 5월)이 된다.

장 총장은 도산과 대립했던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안호상 초대 문교장관을 통해 사표 제출 압력을 넣자 이를 거부하고 ‘난 사표를 내도 서울대 이사회에 낸다’며 반대했다고 정 전 총리는 회고했다. 장 총장은 그러나 취임 8개월 만인 49년 1월 총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토록 대립이 극렬했다면 사태가 오래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처음에는 학내를 중심으로 국대안 반대파와 찬성파 간 대립이 심했는데 반대파들이 방학을 이용해 고향 등으로 내려가 운동을 벌이는 바람에 전국 400여개 초·중등학교까지 동맹휴업이 번졌어.

하지만 국대안 반대운동이 미군정 반대 등 정치적 주장으로 흐르자 힘을 잃게 됐지. 좌익에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우익 학생·교수들이 뭉치기 시작한 거야. 이젠 공부해야 할 때란 학구파들의 주장이 먹혀들었고, 1947년 하반기 들어 국대안 반대운동은 세력을 잃게 됐지.”

―그렇다면 당시 서울대생들은 어떻게 공부했나요?

“뜻이 있으면 길은 열리는 법이야. 나는 그때 학생들끼리 독서회를 만들어 별도로 공부했어. 요즘 동아리 같은 건데, 7~8명이 모여 원서(외국어책)를 떼는 거였어. 그때 청계천이나 동대문 고서점가를 가면 미 국방부가 미군 교육용으로 보급한 교재 ‘EM(Educational Manual)’시리즈를 살 수 있었지.

유명한 논문을 카피(복사)한 책인데 심리학, 정치학, 행정학, 생물학 등 내용도 다양했어. 정식 과목도 ‘원서 강독’이었을 만큼 영어나 독일어로 된 책을 독회(讀會)하는 게 대학생들에게 유행이었어.

겨울방학 때 강의실에서 공부할 때면 수위 아저씨들이 추운데 고생한다며 장작을 가져다주곤 했었지.”

―초창기 강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교재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예습도 할 수 없었어. 우린 ‘필기 강의’라고 불렀는데, 교수가 노트에 적어 와 내용을 읽으면 우리 학생들은 열심히 적는 형식이 대부분이었어. 또 교수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선배를 초청해 질문 답변하는 형태로 보충수업하는 경우도 많았지.”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이 있습니까?

“1950년 6월 24일 오후 돌아가신 김기석 교수(사회학)로부터 6명이 강의를 들었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대한 원서 강독이었는데 워낙 난해한 내용이어서 1시간 동안 2페이지쯤 진도가 나갔을까.

우린 ‘내일 또 만나자’고 헤어졌지. 그 자리엔 이영덕 전 총리도 있었어. 그런데 그게 마지막 수업이 될 줄이야. 그리고 6·25전쟁 후 몇명은 보이지 않았어.”/김영진기자 helloj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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