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문 빠짐없이 번역… 미정책토대 됐지
맥아더가 日이 아시아 맹주라고 해 격분도"


◇일본 도쿄의 미 극동군 사령부(맥아더 사령부)에서 판문점 유엔군 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로 전속돼 근무하던 시절의 박철언씨(왼쪽)

“영어가 우리나라에서 그때만큼 희소가치를 누리던 때가 또 있었을까. 수많은 석학(碩學)과 재사(才士)들이 울분의 삶을 살던 때에 나는 쥐꼬리만한 영어 지식으로 합당치 않은 황금기를 누린 것 같다.”

해방되던 해 20살 청년이었던 박철언(朴哲彦·79)씨는 영어 실력 덕분에 미 군정청에 취직해 1년간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밀항해 다시 미 극동군 사령부(맥아더 사령부)에서 문관 생활을 했다.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 직후 단신 월남해 한·일 양국을 오가면서 격동의 역사를 지켜봤다. 지난 12일 도쿄에 들른 그를 만나 미 군정청과 맥아더 사령부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47년 미군정청에서 1년간 근무하셨지요?

“고향에 있을 때 인민회원회가 교회 건물을 접수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기독교인의 내일이 보이는 듯했다. 아버지의 강력한 권고로 단신 월남해 호구지책으로 미 군정청에 취직했다.

하지 중장이 사령관이고, 아널드 소장이 민정장관이었다. 나중에 안재홍씨가 군정청의 민정장관에 취임하고, 서재필 박사도 최고의정관이라는 직함으로 와서 근무했다. 군정청에선 미군들의 달러 송금에 진정서가 접수되면 그걸 번역한다든지, 미군 수송부대의 통계를 한글로 옮기는 일을 주로 했다. 우편검열과에도 근무했다.”

◇박철언씨가 일본 도쿄의 한 호텔 정원에서 해방 직후 미 군정청과 도쿄 미 극동군 사령부에 근무하면서 겪었던 체험을 본사 정권현특파원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만난 인물들 중에 기억이 남는 사람은?

“이범석 장군 등 유명한 분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선친이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사업을 하면서 김구 선생을 비롯해 현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돈을 많이 냈다. 따라서 나는 정치인에 대한 신비감은 없었다.

김구 선생은 촌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여운형 선생도 혜화동에서 연설하는 장면을 직접 봤는데 즉흥적이라는 느낌만 받았다. 이청천 장군은 광복군 제1지대장을 지낸 분인데, 이범석 장군보다 서열은 높았다.

이런 분들이 나한테 ‘자네 아버지가 누구지’라며 잘 대해줬다. 이청천 장군은 나중에 일본 밀항자금을 구할 때 꽤 많은 금액을 보태주셨다. 신익희 선생은 우리 문관들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카리스마가 있었다.”

―영어는 어떻게 배웠나요?

“고향에서 교회를 다니면서 캠벨 목사라는 분한테 직접 배웠다.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 이 학교, 저 학교를 많이 전전하면서도 영어는 내가 가장 집착한 과목이었다. 상하이에선 미국 학교에 다녔다. 그 영어가 호구의 방편이 될 줄 몰랐다.”

―해방된 조국에 대한 느낌은 어땠습니까?

“해방 후 한국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자기 상실의 나라였다. 다시 강대국에 의해 지배를 받는 종속국이 되는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북쪽의 김일성이 그렇게 오래 간다고 보지도 않았다. 1948년도 후반에 들면서는 누구나가 남북한 전쟁은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 결심을 하고 밀항선을 타러 부산으로 내려가는 열차 안에서 본 신문에는 그 전날 저녁 개성에서 인민군의 대남 위협포격이 있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일본에서도 다시 미군 군속으로 근무했지요?

“일본 대학에 입학했는데, 등록금 규모가 엄청났다. 우선 돈을 벌자. 어디 영어 팔아먹을 일자리는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다가 맥아더 사령부에 일자리를 구했다.

중국에서 선친과 친밀하게 지내던 ‘한도봉’이라는 분이 도쿄에 와 계셨는데, 그분 소개로 들어갔다.

한도봉씨는 본명이 ‘위혜림’인데, 김구 선생 일행과 함께 귀국했다가 김구 선생 개인특사 자격으로 맥아더 사령부와 접촉하기 위해 일본 체류 중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맥아더 사령부에선 무슨 일을 했습니까?

“거기서도 주로 번역 일을 했는데, 한국군 관련 문서와 한국 정치인들의 발언 등을 번역했다.

한국 신문도 빠짐없이 번역해 미국으로 보냈는데, 그게 미 국방성의 정책 기조가 됐다. 사무실은 도쿄의 유센(郵船)빌딩 안에 있었는데, 당시 2국 책임자가 윌로비라는 미국 대령인데, ‘스몰 패튼’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는 계철순 대령 등 한국군도 많이 파견 나와 있었다. 당시 내 일기를 뒤져보면 맥아더가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 역할을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데 대해 격분한 내용 같은 게 남아 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6·25를 맞았겠군요?

“전쟁이 터지면서 내가 소속된 제2국 사무실도 전쟁이 시작됐다. 북한에 대한 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 이리저리 얻은 책자와 신문이 전부 번역 부서로 옮겨졌다. 번역요원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하루하루 격무의 연속이었다.

한반도 지도를 걸어놓고 공산군 점령지를 붉은 연필로 채우면서 부산도 안심할 수 없다는 느낌을 가진 적도 있다. 그때 맥아더 사령부가 만든 홍보영화나 미군 전투기가 찍어온 무성 화면 등을 많이 봤다.

가족을 두고 온 몸이라 피란민 행렬을 주의 깊게 많이 살펴봤는데, 두루마기에 기관총을 숨긴 피란민의 모습도 있었다. 아마 다음날 미군기가 곧바로 폭격했을 것이다.

‘노근리 사건’도 그렇게 해서 발생한 게 아닐까. 북진하는 국군을 환영하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당시 맥아더 사령부 내에선 김일성 체포 여부가 특별한 관심사였다.”

―맥아더 사령부 근무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6·25가 나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과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가 맥아더의 주선으로 도쿄에서 만났다.

해방 후 첫 한일정상회담인 셈인데 상대에 대한 기대나 예측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뤄진 원수지간의 만남이었다. 단 한 건의 합의사항도 없이 회담은 끝났다.

회담 마지막날 어색하게 이별하면서 요시다 총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에 아직 범이 남아 있소’라고 물었다. 이에 이 대통령이 ‘한국범은 가토 기요마사가 다 잡아가지 않았소. 가토가 죽이지 못한 범이 한 마리만 남아 있소’라며 엄지손가락을 자기 코에 댔다고 한다.

나중에 요시다는 이 대통령의 응어리를 풀어주지 못한 데 대해 많이 후회했다고 들었다. 또 6·25가 일본 전후 경제 부흥의 기점이 됐다는 사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당시 사세보항 등에 미군 물자가 쌓이고, 포탄 등을 일본에서 생산해 전선으로 보내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한번은 전철을 탔는데 젊은 일본 국회의원 한 사람이 ‘조센진들이 천벌을 받았다’고 떠들더라. 그래서 ‘지금 수천만명이 고생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며 따지니까 그 친구가 새파랗게 질려서 싹싹 빈 적이 있다. 일본 분위기가 그랬다.”

―자서전에 맥아더 사령부에서 문익환 목사와의 인연이 나와 있더군요.

“1951년에 나는 제2국 한국팀에서 미군 장병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제2국 직속 언어학교로 옮겨갔다. 거기에 10여명의 한국인 교사가 있었는데, 그중 한 팀의 장이 문익환 목사였다.

내 직속상관이었다. 문 목사는 한국 교육자 모임의 외국시찰단 일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6·25가 터지면서 귀국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육군 문관으로 파견 나와 있었다. 나중에 문 목사의 밀입북 사건 때 이름이 알려진 정경모씨도 언어학교 교사였다.

두 사람 다 악보만 보고 거침없이 노래를 부르는 음악의 재사들이었다. 당시 막 유행하기 시작한 ‘테네시 왈츠’ 악보를 손에 들고 듀엣으로 노래 부르던 모습이 선하다.

문 목사는 나중에 내가 서울 동대문 경찰서에서 일본 체제 당시 행적을 조사받을 때 경찰에서 ‘이 사람이 공산당과 관계없었다는 것은 내가 증명할 수 있다’고 증언해 주었고 그 덕분에 풀려났다. 그런 분이 평양 가서 김일성과 포옹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도쿄=정권현특파원 khj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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