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청진·평양으로… 40일씩 연극다녔지
부민관서 인기공연하면 덕수궁까지 줄섰어"


◇연극계의 원로 황정순씨가 고려대생 조중렬군에게 해방의 기쁨과 좌우대립. 전쟁의 혼란 속에서 보낸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창종기자 cjkim@chosun.com

1945년 8월 15일 원로배우 황정순(黃貞順·80)씨는 어머니(박순여·1961년 작고)를 모시고 고향집이 있던 경기도 소사에 있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독립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모녀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간이역이었다.

혹시나 징용 나간 두 살 위의 오빠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기쁨에 겨워 많은 이가 ‘만세’를 외치고 있을 때, 황씨의 어머니는 ‘용주야, 용주야’ 하며 오빠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오빠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생사(生死)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황씨가 오빠의 소식을 접한 것은 1986년. 한 일본인 기자로부터 오빠가 해방 직전 필리핀의 브라우엔 섬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 것이다. 황씨는 “기다림만 가슴에 안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노(老)배우의 가슴에는 이처럼 못다 한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 황씨는 서울 삼청동 자택 부근 한 카페에서 만난 고려대생 조중렬(서어서문학과 2학년)씨에게 해방 직후 연극계의 극심했던 좌우(左右) 대립이나, 6·25 전쟁 중 몇 차례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황씨는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나왔다.

―오빠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요.

“한 일본인 기자에게 오빠 이름을 가르쳐주고 소식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오빠 유골이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모셔져 있다는 소식이 왔어. 나카가와 가즈요시(長川和渽)란 일본 이름으로 말이야. 1944년 12월 필리핀에서 돌아가셨다는 기록이 일본에 있었나 봐. 가족만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거지.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도 오빠의 이름을 불렀어.”


◇지난 1986년 일본이 사망증명서와 함께 보내 온 원로배우 황정순씨 오빠의 야스쿠니신사 합사 증명서.

―유골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돌려달라고 했지. 한데 불가능하대. 아무리 말해도 안 된다는 거야. 내 죽기 전에 오빠의 유골을 내 손으로 꼭 안아보고 싶은데.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눈물이 나네.”

―일제시대 때는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해방을 기다렸지. 우리 집은 원래 인천 쪽이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건물 짓는다고 싹 소개시켰어. 그래서 소사로 내려와 살게 된 거야. 보상은 한 푼도 못 받았어.

우리 어머니는 집에 작은 불상을 모셔 두고 있었는데, 그 밑에 태극기를 고이 접어서 숨겨 놓고 계셨던 분이야. 언젠가는 그것을 꺼내 쓸 수 있을 날이 있으리라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지.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었어.”

―연극은 어떻게 해서 하게 되셨나요.

“오락거리가 없었잖아. TV가 있어 뭐가 있어. 나는 열여섯 살 때 동양극장에서 시작했어. 볼거리가 귀했던 시절이라 배우들은 하루 4회 공연도 아무 말 없이 해내곤 했지. 위경련이라도 나면 벽돌을 불에 달궈서 따듯하게 해 가지고 배에 품고 무대에 올랐어. 왜정 때는 만주까지 공연을 다녔지.

도시에서 인력거 타고 마을을 돌며 극단이 왔다는 것을 알렸어. 그러다 인력거 바퀴가 빠져 구르기도 했어. 해방되고도 마찬가지였어. 부민관에서 인기공연을 할 때는 극장 입구에서 덕수궁 문 앞까지 사람들이 줄을 섰어.

나도 배우가 되기 전에는 오빠 등에 업혀 다니면서 연극·일본영화·미국영화도 많이 봤어. 방석이 하나에 5전씩이었는데 오빠가 두 개를 사서 다 나한테 깔아줬지. 어렸을 때 몸이 아파서 병치레를 많이 했는데, 영화나 연극 구경만 가면 아픈 기색이 싹 없어지곤 해서 다들 신기하다고 했지.”

―해방되고 난 다음 연극계는 어땠습니까.

“해방되고 나니까 연극단체들이 막 생기더라고. 좌익 계열도 많았고, 북으로 간 사람도 있었지. 나는 처음 시작했던 동양극장 청춘좌 소속 배우로 그대로 있었어.

그때도 평양으로, 청진으로 40일씩 연극하러 다녔지. 그러다가 원산에서였던가, 38선 그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랴부랴 챙겨서 내려왔어. 다행이었지.

1949년에 이해랑 선생이 나를 챙겨줘서 ‘신극협의회’로 옮겼어. 그렇게 해서 중국 작품 ‘뇌우’도 하고, ‘원술랑’도 했어.”

―해방되고 난 다음에 일제시대와 달라진 것은 뭐가 있었나요.

“일본어로 하는 단막극을 안 해도 됐지. 옛날에는 조선 사람들이 연극을 해도 반드시 일본어로 하는 단막극을 꼭 한편씩 하게 했거든. ‘홈 스위토 홈’ 같은 걸 했어. 그걸 안 하면 ‘대지의 어머니’ ‘유랑 삼천리’ 같은 것도 무대에 못 올렸어.

그리고 순사들이 반드시 두 명씩 극장에 들어와 감시를 했어. 일종의 검열을 했던 거지. 그랬는데 해방되고 난 다음에는 그런 걸 안 해서 좋았지.”

―6·25 때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북한으로 끌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배우들도 있었는데요.

“나도 고비를 많이 넘겼어. 전쟁 터지고도 참 어떤 세상인지 몰랐나 봐. 전쟁 나기 직전에 지금 서울시의회 자리에 있던 부민관에서 ‘원술랑’ 공연을 했어.

그러다가 6·25가 터졌는데, 나는 잠시 집에 숨어 있다가 아무래도 월급을 받아야겠기에 극장을 찾아갔지. 한데 사람들이 다 떠나고 아무도 없는 거야.

대신 북으로 갔던 사람들이 내려와 그 자리에 있지 않겠어. 그때 박창환 선생이라고 옛날 나한테 연기를 가르쳐 주셨던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높은 분 같았어. 그이가 날더러 ‘너 여기서 뭐하니. 빨리 가라. 곧 시가전이 벌어질 거니까. 얼른 가라’ 그러시는 게야. 그래서 얼른 나왔지.”

―서울에 남아 있던 다른 연극인들은 명동성당에 강제수용되어서 사상 교육도 받고, 북으로 끌려가기도 했는데 잘 숨어 계셨나 봅니다.

“어머니 모시고 숨어 있을 때였어. 부민관에서 북쪽 인민배우들이 공연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한데 그네들은 어떻게 연극을 할까 그게 궁금한 거야.

그래서 참지 못하고 찾아갔지. 몰래 객석에 숨어서 연극을 보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어깨를 두드려. 그리곤 어디론가 데려가는 거야. 갔더니 여배우 김양춘이 앉아 있다가 ‘쟤는 왜 데려왔어?’ 하면서 돌려보내라는 거야.

그러니까 나도 명동성당 입구의 리스트에 있어서 데려온 건데, 이번에는 김양춘이 날 살려 준 거지. 서로 사상은 달랐지만, 스승은 스승이었던 게고, 그분들이 나를 도와 준거지.”


대구 피란지에서 '햄릿' 공연1951년 9월 대구 피란지에서 '햄릿' 공연 후의 기념촬영.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혜랑. 다섯 번째 박상익.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최무룡. 여섯 번째 황정순. 일곱 번째 김동원이다. 스태프들은 군복차림이다. / '미수의 커튼콜. 김동원 나의 예술과 삶' 중에서

―전쟁 때는 통 연극 못 하셨겠죠.

“아니야, 전쟁 때도 연극을 했어. 서울에서 숨어 지내다가 1·4후퇴 때는 피란을 떠났어. 이해랑 선생이 트럭을 한 대 구해가지고 연극인들을 태우고 대구로 갔지.

우리 연극인들은 대구극장 지하에 짐을 풀었는데, 육군 정훈국 산하의 ‘727부대’라고 불렸어. 1소대가 연극, 2소대가 무용, 3소대가 연예였지. 그때 군복도 입고 다녔어.

밤새 대사를 외우느라 군용 트럭에 시동 걸어서 불 켜놓고 대본을 읽고 그랬지. 마산으로 부산으로 위문공연을 가면 트럭 6대를 붙여서 무대를 만들고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 놓고 장병들 앞에서 공연을 했지.

남편도 대구에서 만났어. 시어머니도 연극을 좋아하셔서 그분 댁을 우리 신협 회원들의 연습장소로도 사용했지.”

―후배들한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면….

“난 한평생 연극만 하면서 살아왔는데, 그 과정에서 좌우익 대립도 보았지만 그때마다 선배들 도움으로 살았어. 사람이 진실하게 자신이 하는 일을 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될 것 같아.” /신동흔기자 dhshin@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