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부터 만들자… 학업대신 군에 투신
일본 군복 잘라입고 신념 하나로 지켜냈지"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구리묵동 전 일본군 특별지원병훈련소 자리(지금의 태릉 육군사관학교). 단 이틀 동안 모집한 병사 225명이 도열한 가운데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 A 중대 입대식이 열렸다. 1907년 8월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이후 39년 만에 우리 민족의 정식 군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미 군정청 ‘대나무 계획(Bamboo Plan)’에 따라 창설된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육군의 모체였다. 당시 창군 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김계원(金桂元·82) 전 육군참모총장, 김종면(金宗勉·82) 전 육본 정보국장, 황헌친(黃憲親·84) 전 1군사령부 참모장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 사람은 모두 학병(學兵) 출신으로 미 군정 영어군사학교에서 임관했다.


◇1954년 원주에 모인 사단장들 1954년 강원도 원주에서 열린 전군사단장회의에 참석한 초기 국군의 수뇌부. 동그라미 표시가 당시 27사단장 김계원 준장이고, 맨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백선엽 장군, 그 오른쪽은 송요찬 장군이다.

―초기 군사간부 육성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황헌친=미 군정이 1945년 말 ‘군사영어학교’를 열었지. 이듬해 4월까지 장교 110명이 임관했어. 이들이 전국에 흩어져 초기에 9개 연대 창설을 주도했지.

▲김종면=학병 출신이 68명, 만주군 21명, 일본군 19명, 중국군(광복군) 2명이었지. 영어수준별로 A·B·C·D 4개 반이 있었는데 영어를 잘하거나 장교 경력 있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임관됐어.

―학병 출신이 꽤 많았군요.

▲김계원=실용주의적인 미 군정은 간부 경험자를 원했어. 처음엔 광복군 20명, 일본군 20명, 만주군 20명 등 60명을 뽑을 계획이었다지. 그런데 광복군은 ‘본류(本流)’를 주장하며 거의 참여를 안 했어. 또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은 자숙하는 분위기가 많았어. 그나마 강제로 끌려간 학병은 명분상 떳떳했기 때문에 많이 참여한 것 같아.

초기 군사간부 육성때 학병출신이 많이 참여 일·만주군출신은 자숙

―군사영어학교는 몇 개월 뒤 없어졌죠.

▲김계원=1946년 5월 설립된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가 뒤를 이었지. 군사영어학교에서 임관하지 못한 사람들과 이후 중국·만주 등에서 뒤늦게 귀국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어.

―창군 멤버들은 건국의 신념이 확고했나요.

▲황헌친=그럼. 미 군정청에서 임관하는 날 서약을 했는데, “미 군정 정책에 충실하고, 나중에 수립될 한국 정부의 정식 군대에 충성을 다 한다”는 내용이었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이었지.


◇국군의 전신인‘조선경비대’창설에 참여했던 김종면?김계원?황헌친(사진 왼쪽부터) 예비역 장군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만나 옛일을 회상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진한기자magnum91@chosun.com

입대규정 너무 느슨 좌익 軍침투 못 막아 자다가 구타 당하기도

―어떻게 해서 군에 들어갈 생각을 하셨나요.

▲황헌친=와세다 대학 법률전공 예과에 다니다 징집됐어. 예비사관학교 다닐 때 광복됐고 일본서 공부를 계속하려는데 집에서 온 편지를 받고 1945년 11월 서울에 왔어.

서울대 등록을 준비하다 우연히 군에 함께 있던 친구를 만났지. “좌·우익이 갈라져 사상투쟁으로 난리고 서울대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무슨 공부냐. 군에 가서 나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 그래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지.

▲김계원=당시 군에 투신하는 사람들 생각은 다 똑같을 거야. 무엇보다 건국이 절실하다는 것을…. 대학 다니다 학병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어. 비록 일제 때 태어났지만 나라 없는 설움은 몸으로 알 수 있었거든.

―장교들이 직접 모병을 하면서 부대를 만들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황헌친=지원자가 넘쳤어. 1946년 3월 춘천 8연대에 다른 소위 한 명과 배속됐는데, 중대장 딱 한 명이 있더라고. 우리 세 명이 춘천·강릉·원주·울진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모았어. 한 1주일 만에 200~250명 정도를 모아 중대를 만들었지. 인재도 참 많이 들어왔어. 군복이 없어 일본 군복을 개조해서 입혔고, 무기도 일본제 99식 소총이 전부였어.

▲김종면=일본 군복을 짧게 잘라 만든 군복을 ‘아이젠하워 재킷’이라고 했지. 경비대가 윤곽을 갖추고 난 뒤에야 미군이 군복을 줘서 그걸 수선해서 입혔지. 총은 1947년 중반쯤부터 미군이 준 M1 소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어.

―우리 군의 무장이 신통치 않았군요.

▲김종면=미군 철수를 전후로 무기와 장비들이 많이 이양됐지. 하지만 북한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었어. 6·25 때 우리는 M1 소총으로 ‘땅땅’ 했는데 북한군은 따발총으로 ‘드르륵 드르륵’ 쐈잖아. 그래도 용감히 싸웠어. 우리는 장갑차 몇 대 갖고 기갑연대 만들었는데, 저쪽은 탱크로 밀고 들어왔고…. 105㎜ 야포가 아예 없는 부대도 있었다니까.

▲황헌친=우리 국군은 공산당에 나라를 넘겨줄 수 없다는 신념으로, 무기도 제대로 없는 맨손으로 이 땅을 지켜낸거야.

―군 조직에 좌익이 많이 침투했었다고 들었는데요.

▲김종면=젊은이들은 6·25전쟁만 알지만 사실은 창군 때부터 이미 공산당과 전쟁을 시작했던 거야. 미 군정은 사상에 관계없이 받아들이라고 했지. 좌익은 장교나 하사관으로 조직적으로 침투했어. 1연대 1·3 중대장이 모두 좌익이었고, 그런 사정은 대전 2연대와 광주 4연대, 대구 6연대, 제주9연대 등 다른 부대도 마찬가지였어.

▲황헌친=부대 창설이 급했기 때문에 입대 절차를 까다롭게 하지 않았어. 신원조회도 제대로 안하고 대원들을 선발했지. 이들 좌익들은 경비대 창설 초기부터 크고 작은 소요를 계속 일으켰고, 1948년 들어 대규모 사건, 즉 4·3사건과 여수반란 등이 일어났지.

▲김계원=1연대에서는 정일권 대대장이 밤에 자다가 집단구타를 당한 적도 있어. 나에게도 대낮에 하사관이 찾아와 “몸조심하라”고 하더군. 부대에 좌익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미 군정 방침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우리는 여러차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받아들이지 않더군.

―실제 전투도 많았죠.

▲황헌친=말도 마. 남한 곳곳에서 공비들과 수없는 전투가 벌어졌어. 특히, 태백산맥과 그 주변 지역이 심했지. 남한 내 무장 좌익과 북에서 산을 타고 내려온 공산당들이었어. 공비들은 강원도 산맥을 따라 지리산까지 내려와 총질을 했어. 신병을 모으는 도중에 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 1948~49년엔 정말 심했어.

▲김종면=서울에서 수원까지 가는데도 무장 없이는 쉽게 못 다녔지. 대구 팔공산 가는 것은 꿈도 못 꿨고, 경북 봉화·영월 지역도 쉽게 나다니지 못했어.

남한 곳곳 공비와 전투 48~49년엔 특히 심해 수원도 무장하고 갔지

▲김계원=대전 2연대 대대장할 때 고향인 경북 영주를 가는데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던지 밑둥이 잘린 전주(電柱)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더라고. 결국 여수반란 이후 대대적인 숙군(肅軍) 작업이 진행됐지.

―국군 장병들의 사기는 어땠나요.

▲황헌친=물론 높았지. 독립된 조국, 민주주의가 꽃핀 나라를 갖게 될 것이란 꿈이 가득했지. 미 군정 시기만 지나면 그렇게 될 거라 굳게 믿었어. 그래서 6·25 때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국군들이 목숨을 바치며 싸운 거잖아. 진정한 독립민주국가의 건설, 그런 공감대가 자연스레 형성됐던 거야.

―군이 한글 교육도 했다고 하던데요.

▲김종면=그랬지. 위에서 지시한 것은 아니고, 각 연대가 자율적으로 실시한 거야. 그래야 훈련도 제대로 시킬 수 있으니까. 신병의 절반 정도는 문맹이었던 것 같아. 훈련이 끝날 때쯤엔 편지를 쓸 정도로 만들었지.

▲김계원=부대 주변 주민들을 불러다 교육시키기도 했어. 그때는 선거 때 출마자 이름이나 기호도 못 읽어 ‘작대기 한 개 두 개’ 하는 식으로 구분하는 사람도 허다했어./장일현기자 ihja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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