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직후 5년간 북한체제를 고스란히 겪은 신인섭교수의 증언이 이어질 때마다 조선일보 인턴기자 신미경(전남대 의류학과 4학년)씨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그게 정말이냐”는 질문을 반복했다. 이명원기자mwlee@chosun.com

"이놈 하던 친구가 갑자기 동무라 불러 너무 우스웠어"

1945년 8월 24일 평양역 광장. ‘위대한 해방군’ 소련군을 맞이하는 평양시민들의 환영행사에서 ‘올드 랭 사인’에 맞춘 애국가 연주가 끝난 후 낯선 러시아 곡 연주가 시작됐다.

평양 장대현교회 김화식 목사의 아들 김동진이 편곡한 이 노래는 평양사범학교 음악책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거의 유일한 러시아 곡이었다.

환영행사가 끝난 후 연주를 맡았던 혼성밴드 대원들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하필이면 그 노래가 ‘제정 러시아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 혼성밴드 대원 중 한 사람이었던 신인섭(申寅燮·76) 한림대 객원교수. 그의 이력 전반부에는 우리 현대사의 간난(艱難)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1945년 평양사범 4학년 때 해방, 1947년 평양교원대 국문과 입학, 1950년 북조선 교육성 편찬관리국, 12월 월남, 1952년 육군 통역학교 중위 임관, 1963년 소령으로 제대.

그후 신교수는 주요 경제신문의 광고책임자 및 광고회사 고문 등을 거치며 광고분야에서 일해왔다.

그는 해방 직후 평양에서 몇 안 되는 브라스밴드의 클라리넷 연주자였기 때문에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각종 행사에 불려 다니며 역사의 현장을 목격했고 젊은 청년의 입장에서 공산화되어가는 북한 체제 5년을 몸소 체험했다.

우리에게는 블랙홀과도 같은 북한체제 5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신세대 인턴기자 신미경(전남대 의류학과)씨는 “마치 우리와는 무관한 미지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 같아요”를 연발했다.

―선생님이 맞이한 1945년 8월 15일이 궁금합니다.

“길에서 마주친 친구 아버지가 ‘히라야마! 일본이 항복했다는구나!’라고 일러주었어요. 그 말을 듣고도 난 믿지 않았어요. 사실 그 전에 8월 15일 정오 ‘옥음(玉音-일본 왕)방송’이 있다는 예고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게 항복선언일 거라고 생각지 않았거든요.”

일본말 히라야마(平山)는 창씨개명 때 평산(平山) 신씨의 평산을 창씨로 삼았기 때문이다.

―소련군 제25군이 평양에 진주한 8월 22일(일부 기록은 25일) 환영식에 가셨다면서요.

“분명한 것은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미군보다 소련군이 먼저 평양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당시 평양사범 말고 평양 제2중학교와 평양농업학교에 일부 연주자가 있어 혼성으로 밴드를 구성해 환영식장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소련에 대해서는 일본의 통제교육이 심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악보 하나 없었지요. 급한 대로 사범학교 음악책을 찾아보니 ‘노서아(露西亞) 국가’라는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김동진 선생을 찾아가 연주를 위한 편곡을 부탁했지요. 그때 편곡료로 쌀 한가마를 제가 직접 갖다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사범학교 음악책은 일제가 만든 건데 거기에 어떻게 소련 국가가 나올 수 있지요?

“뒤에 알게 된 건데 그게 소련국가가 아니고 제정러시아 국가였어요. 그때 인솔장교가 계급이 소령이었으니 아마 그 친구도 그게 무슨 노랜지 몰랐던 것 같아요. 알았으면 총살형이었겠지.”

―당시 브라스밴드가 얼마 안 되다 보니 많은 행사에 동원되었을 것 같은데요.

“그때 수십번 동원됐지요. 당시에는 행사 때마다 마르크스, 엥겔스, 스탈린, 김일성 이렇게 네 사람의 동상을 늘 앞세웠는데 밴드를 했기 때문에 그 힘든 일에서는 늘 면제였지. 대신 ‘김일성 장군의 노래’는 수백번도 더 연주했던 것 같아요.”

―김일성도 직접 보셨겠네요.

“물론이지. 이북에 살았기 때문에 보천보전투에 대한 이야기도 어른들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지요.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환영행사 때 그를 처음 보았는데 인상이 좋았어요. 슬림하고 젠틀하다는 느낌을 줬거든요.

그런데 어른들 말씀이 ‘저건 가짜야’라고 하셨어요.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거지.”

행사때마다 스탈린·김일성 동상앞에서 연주

약탈하던 소련군, 세숫대야 두들겨 쫓아냈어



◇해방 직전 평양사범학교 브라스밴드의 클라리넷 파트 동료들과 함께 포즈를 한 신인섭씨(왼쪽 끝).

당시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스티코프 장군도 보셨겠군요.

“소련군 환영대회를 하는데 그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일본군만 하더라도 장군이라고 하면 근엄하게 말을 타고 옆에 칼을 차고 다녔는데 스티코프는 행사장에서 차에서 내리는데 옆에 마누라를 끼고 있더라고. 충격이었지. 그때 ‘아! 이게 서양과 동양의 차이구나’라면서 문화충격을 느꼈어요.”

―요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미군은 점령군, 소련은 해방군’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시 소련군을 ‘위대한 해방군’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군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완전히 ‘도둑놈, 강간범’들이더라고요.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지도부에서도 간접적인 방조가 있었을 겁니다. 스트레스 좀 풀라 이거지요.

그래서 당시 친구들과 일종의 자경대를 만들었어요. 유기로 만든 세숫대야를 동네 골목마다 달아놓고 있다가 멀리서 소련군이 나타나면 마구 두들기는 거예요.

그러면 소리에 놀라 소련군이 달아났지요. 해방군, 점령군 운운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예요.”

평양 ‘특별전차’ 비판하자 수차례 자아비판

김구선생 온다니 타도하자던 팻말 사라져


―북한에서 소위 ‘공산화’라고 하는 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어떤 계기로 느끼셨나요?

“처음에는 그렇게 심하게 하지 않았어요. 다만 각종 단체를 만들고 나도 민청(민주청년동맹)이란 데 가입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호칭을 ‘동무’라고 하라더군요.

사실 웃기잖아요? 좀 전까지 이 놈, 이 자식 하던 친구에게 정색을 하고 ‘동무’라고 부르니까 어색할 수밖에요.

그런데 주변에서 ‘동무’라고 하면서 킥킥거리던 친구들이 불려가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니 겁나더라고요. 몇 달 지나니 그나마 익숙해지더군요.”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하고 나서 농민들은 좋아했을 것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땅을 받은 농민을 제외하고는 다 불만이었지요.

그런 데다가 막상 수확을 할 때가 되자 북한정권은 일제하 공출보다 더 많은 비율로 수확물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면서 농민들의 마음도 돌아섰지요.”

―선생님은 지주 집안이셨나요.

“그렇지 않아요. 저의 부친은 소학교 선생님이셨고 평양에서 북쪽으로 100리쯤 떨어진 평원군에 고향이 있었는데 굳이 따지면 우리는 소농이었지요.

그런데 이 동네에 기독교를 열심히 믿는 사람이 많아 성분이 안 좋은 동네로 분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신분상의 피해를 본 적은 없습니다. 1950년에 일종의 교육부 공무원으로 차출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왜 6·25 때 남쪽으로 넘어오게 됐습니까?

“난 사실 이렇다 할 정치적 지향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때 평양에서는 벌써 일반인이 타는 전차와 당 간부들이 타는 전차가 구분되어 있었어요.

어느날 급한 일이 있어 텅비어 있는 특별전차를 타려니까 승무원이 못 타게 했습니다. 그때가 대학1학년 때였는데 학교에서 수필경연대회를 하는데 이 이야기를 썼지요.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되자는데 특별전차는 이상한 것 아니냐는 취지였는데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자아비판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인간으로서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남쪽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지요.”

―1948년 김구 선생이 북한에 갔을 때도 북쪽에 계셨는데요.

“재미있는 것은 그 전까지 북한 곳곳에 ‘김구 이승만 타도하자’는 팻말이 붙어 있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북한에서는 이승만보다 김구의 이름이 늘 앞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당에서 나온 사람들이 ‘김구’라는 이름을 지우고 다니더군요. 그리고 얼마 후 김구 선생이 평양에 오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50년 당시 중앙공무원으로 일하셨다면 북한의 전쟁준비 상황도 아셨을 텐데요?

“솔직히 전혀 몰랐습니다.”

전쟁 중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잠시 사병으로 복무하다 대학졸업자라는 게 확인돼 통역장교가 된다.

―북한 체제하 5년을 한마디로 정리하신다면요?

“나이트메어(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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