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이준-박정훈기자】

‘세계 7대 불가사의’. 일본인의 형편없는 영어실력을 스즈키 아키타(령목소헌) 현립대학장은 피라미드에 필적할 수수께끼로 비유한다. 일본인의 토익(TOEIC) 평균점은 말레이시아의 65% 수준(96년). 2년전 토플(TOEFL) 성적은 세계 221개국 중 북한과 같은 205위를 기록했다. 10명 중 4명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경제대국의 성적표 치고는 창피할 정도다.

일본의 ‘영어음치(음치) 망국론’은 98년 봄 최고조에 달했다. 금융이 위기에 몰리고 엔화가 폭락하던 시기였다. ‘금융패전’을 둘러싼 수많은 분석과 복잡한 처방이 쏟아지는 가운데 재계 리더인 우시오 지로(우미치랑) 경제동우회 대표간사(당시)는 간단한 설명법으로 누구도 말하기 꺼려하던 핵심을 찔렀다. “일본의 금융불안은 정치인-관료가 영어를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인은 영어에 자신이 없는 탓에 국제회의만 나가면 몸을 사린다. 엔 약세도 정부 당국자가 국제사회에 일본의 실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탓이다. ” 그의 지적은 엔약세 저지작전과 금융재생의 국제협상을 담당하는 정-관계 라인이 하나같이 ‘영어음치’인 점을 겨냥하고 있었다.

하시모토 총리가 그랬고, G7(선진7개국) 회의에 나가 집중포화를 받곤 하던 오부치 외상이며 마쓰나가 대장상(이상 당시)도 벙어리에 가까웠다. 관료들은 반박했으나 일본내 여론은 우시오 간사의 편을 들어주었다.

98년 7월 독일 본에서 열린 G8(선진7개국+러시아) 외무장관회담 현안을 타결지은 홀가분함 때문인지 장관들은 웃어가며 옆사람과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일한 예외가 오부치 일본 외상이었다. 입을 다문채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모습은 ‘G7 선진국클럽’ 안에서 소외되는 일본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경제기획청 장관을 지낸 데라사와 요시오(사택방남) 참의원은 ‘영어음치가 나라를 망친다’는 충격적 제목의 책을 펴냈다. 그에 따르면 역대 일본 총리와 외상 중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것이다. 미국생활이 22년에 달하는 데라사와 의원은 일본 정치권의 대표적 국제통이다. 영어실력에서 ‘일본쇠락론’의 실마리를 풀어나간 이 책은 정치인 저서 치고는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에서 ‘맥도널드’ 햄버거를 찾다가는 굶을 가능성이 크다. “마구도나루도”라고 ‘화제(화제)발음’을 하기 전엔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인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노구치(저구효) 도쿄대학 교수는 도쿄에 국제 금융시장이 형성되지 못하는 이유로 “빈약하기 그지없는 영어 인프라”를 꼽는다. ‘맥도널드’가 통용되지 않는 풍토에선 외국 금융기관도, 돈도 몰려들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영어 후진국이 된 원인은 역시 잘못된 교육 탓이다. 입시 목적의 암기 위주 영어교육은 대부분의 대졸자를 ‘영어 벙어리’로 만들고 있다. 중학교부터 영어수업을 시작하는 것은 너무 늦다는 결론도 내려졌다. 반성 끝에 영어 교육시스템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기업들도 사원의 영어실력 기르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마쓰시타전기는 올 봄부터 주임 승격(평균 28세)의 조건으로 TOEIC 성적을 요구키로 했다. 승진하려면 450점(해외업무 담당자는 650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후지쓰는 사내 영어 붐을 일으키기 위해 회장 이하 전직원 3만명이 동시에 TOEIC 시험에 응시, 화제를 모았다. 입사 2년째 600점을 취득한다는 게 후지쓰의 내부 목표다. 프랑스 르노 계열로 넘어간 닛산(일산)자동차는 사내 공용어를 영어로 정했다. 임원회의나 르노측 관계자가 참석하는 회의는 모두 영어로 진행된다. 덕분에 영어와는 담을 쌓고 지내왔던 닛산 직원들은 퇴근후 영어학원에 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가 하면 입사시험 때 TOEIC 점수를 반영하는 기업 비율이 60%까지 올라갔다는 통계도 나와있다.

영어교육 개시 시기는 2002년부터 초등학교 3학년으로 앞당겨진다. 문부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설학원에 초등학교 어린이의 주말 영어교육을 위탁하는 제도를 도입키로 했다. 우선 올해 중 100개 시범지역에서 4∼6학년 5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뒤 점차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junlee@chosun.com

/jh-park@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